금융노동자들이 유연근무제에 울상을 짓고 있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탁상행정에 일하는 시간만 늘어난다는 하소연이다. 정부는 저출산 해소와 일·가정 양립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유연근무제 확산 정책을 펴고 있다. 제도 자체가 은행 영업시간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겉으로는 노동자 편의를 봐주는 척하지만 정작 노림수는 딴 데 있다는 얘기다. 노동계는 제도 운영 추이를 지켜본 뒤 대응할 계획이다.

"직접 해 봤더니…"
은행원 10명 중 7명 "확대 반대"


9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전국에 분산돼 있는 파트너그룹당 1개 지점을 유연근무제 적용 점포로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국민은행은 영업 시너지를 높이기 위해 인접한 점포들을 하나의 파트너그룹으로 묶어 운영한다. 이 경우 현재 48개인 유연근무제 점포가 150여개로 늘어난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12월부터 45개 점포에서 시차출퇴근제를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직원들이 오전 9시·10시·11시 중 하나를 골라 출근하면 점심시간을 뺀 8시간을 일하고 6시·7시·8시에 퇴근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다. 세 곳의 점포는 직원들이 각각 오전 9시와 정오에 출근해 7시간씩 일하는 2교대제도 운영하고 있다. 영업점을 찾는 사람이 많을 때 인력을 집중한다는 취지다. 국민은행은 제도를 도입하며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과 고객 편의를 위한 것”이라고 홍보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최근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가 유연근로제가 적용되는 조합원 475명 중 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유연근무제 시범실시 결과 정해진 근무시간이 잘 준수되고 있냐"는 질문에 72%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이 중 46.8%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강한 부정의사를 표했다. 72.5%는 "유연근무제 확대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지부 관계자는 “매일 은행이 문을 열기 전 지점장이 주재하는 영업회의가 열리는데 누가 10시에 출근할 수 있겠느냐”며 “문을 닫으면 출납 금액을 맞추는 시재작업을 해야 하는 만큼 일찍 출근했다고 중간에 집에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직원들에게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준다면 문제는 사라진다. 하지만 같은 조사에서 응답자 76.1%가 “희망자 공모와 관련해 충분한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일부 부작용을 인지해 이달 3일로 예정됐던 확대운영 계획을 미룬 상황"이라며 "노사협의회를 통해 노조와 함께 취지에 걸맞게 제도가 운영되도록 보완책을 찾겠다"고 말했다.

노동계, 제도 악용 드러나면 본격 대응

유연근무제는 시중은행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추세다. 신한은행은 지난해 ‘스마트워크’ 일환으로 전체 직원이 한 달에 세 번 날을 정해 오전 7시와 오전 10시 사이에 출근하도록 하는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다. 출근 후 정확히 9시간 후면 컴퓨터가 꺼지는 피시오프(PC-off) 제도와 연동했다. 올해 2월부턴 일주일에 3일로 제도를 확대 운영 중이다.

문제는 유연근무제 이행 여부가 핵심성과지표(KPI)에 반영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직원들의 업무방식이 오히려 경직되는 역효과가 나고 있다. 신한은행지부 관계자는 “회사가 추가인력을 뽑지도, 업무량을 줄이지도 않은 채 유연근무제를 운영하면서 당일 처리해야 할 일을 몰아서 하게 돼 전체적인 업무부담이 커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주 3회에서 2회로 유연근무일을 점차 줄이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우리은행은 60여개 본사부서·영업점을 대상으로 오전 11시까지 1시간 단위로 출근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유연근무제를 시범운영하고 있다. 우리은행지부는 “현재 인사부와 함께 TFT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달 말 시범운영이 끝나면 현장 피드백을 갖고 입장을 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KEB하나은행도 유연근무제 도입을 추진 중이다. KEB하나은행지부는 “사측이 최근 유연근무제 도입을 논의하자는 요청을 한 상황”이라며 “조합원들의 의견을 듣고 협상 요구에 응할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조 관계자는 “육아에 도움을 줄 수 있고 현장 수요도 있어 우선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며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나타나면 구체적인 방안을 세워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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