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어제부터 촉촉히 내린 봄비는, 마른 은행나무 가지에 송골송골 연두 새잎을 달아 놓았습니다. 이 비가 그치면 산이나 들의 빛깔이 또 달라지겠지요. 어떤 자극에 의해 ‘깨어남’과 ‘솟아남’이 봄의 생태라면 그 본질은 한마디로 ‘바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봄은 결국 ‘달라짐’을 통한 ‘새로움’입니다. 씨알 하나도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딱딱한 낡은 껍질을 벗어 던지는 것처럼, 우리도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버려야 합니다.

지난겨울 우리는 촛불을 들고 거리와 광장을 누비면서, 결국 어렵게 대통령 박근혜와 그 패거리들을 버렸습니다. 우리 삶의 새봄을 맞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드디어 박근혜는 감방으로 가고, 박근혜 없는 봄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이고, 뭔지 모를 찜찜함만 남아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함께 버려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고, 바뀌어야 할 것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까닭입니다. 산과 들의 변화도 씨알 하나를 비롯한 모든 개개의 변화에서 시작되듯 우리 사회의 변화도 결국은 모든 각자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은 방관자나 구경꾼으로 남아 있는 그런 사회의 변화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박근혜가 구속되고 며칠 뒤의 일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젊은 친구 한 분을 만났습니다. 박근혜 구속까지 5개월 동안 21번의 촛불집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은 분입니다. 너무도 열정적이어서 스스로 손피켓을 만드는가 하면, 언제나 가족은 물론이고 이웃까지 함께 데리고 나옵니다. 집회는 말할 것도 없고 시위에도 참석해 늘 자기 부대를 이끌고 목적지까지 행진을 합니다. 그리고 마칠 때는 반드시 그곳 주변 맛집에서 저녁을 넉넉하게 사고, 뒤풀이까지 하며 즐기던 분이었습니다.

모임이 끝난 뒤 같이 저녁 겸 뒤풀이를 하러 갔는데, 그렇게 좋아하던 막걸리를 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박근혜가 구속돼 서울구치소로 향해 가는 초췌한 모습을 보면서 당연하다는 생각과 함께 승리감에 도취되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저게 최종 목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대방만 변화시켰다고 해서 내 삶이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나도 변화하려는 노력을 통해 동시에 변화해야 우리의 삶이나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분간 술과 담배를 자제하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촛불을 드느라 무리하게 행동해서 건강이나 생활습관이 많이 흐트러졌는데 그것부터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기특하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잠시 주변을 돌아봤습니다. 우선 임박한 대통령선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통령선거야말로 나라를 바꿔 인민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사회를 정의롭게 하는 것인데, 그런 근원적인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대통령이란 최고 권력을 잡고 보자는 생각이 앞서 있는 것 같습니다. 당선을 위해서라면 당의 정체성도 버리고 개인의 소신도 포기하며, 악마와도 손잡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는 꼴은 적폐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건설하라는 촛불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더 꼴불견은 박근혜의 몰락과 함께 이른바 보수진영에 책임을 물어 새누리당을 붕괴시켜 버린 반사이익으로 정권교체가 구체화되자, 마치 대통령이 된 듯이 나대는 더불어민주당 일부 패거리들입니다. 그럴수록 정책을 새롭게 하고 전망을 세워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국가 건설에 매진해야 할 텐데 선거 공학적 이해와 다수의 인기에만 몰두하고 있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진보진영입니다. 이번 촛불시민혁명의 최대 수혜자는 진보정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려움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번 촛불을 통해 진보정치 세력이 노동자·농민·도시 서민 등 기층민중을 중심으로 다시 단결하고 진보의 기치를 높이 들고 당당하게 다시 나서야 하는데,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노동자 정치세력의 중심 역할을 해 온 민주노총의 책임이 커 보입니다. 지금부터라도 크게 단결해 사표 걱정 없이 끝까지 완주하며, 진보정치의 영역을 분명히 확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올봄은 촛불이 바꿔 놓은 토양에 새로운 씨를 뿌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걸 일시에 바꿔 놓는 봄비는 무섭습니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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