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양한 세월호를 실은 화이트마린호가 지난달 31일 전남 목포신항에 접안해 있다. 정기훈 기자
▲ 인양한 세월호를 실은 화이트마린호가 지난달 31일 전남 목포신항으로 들어오고 있다.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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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를 직접 보니 어땠냐”고 묻자 지체 없이 울음이 튀어나왔다. 질문에 이어 흐느낌이 나올 때까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참고 있던 울음이었다. 용수철 같은 눈물이었다.

세월호가 지난달 31일 사고발생 1천81일 만에 뭍으로 돌아왔다. 이날 오후 목표혜인여중 3학년 이정민(15)양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맨드라미색 교복을 입고 세월호가 누워 있는 목포신항을 찾았다. 철책 너머 바다를 보며 한참을 울다 갔다. 목포시민을 비롯해 마침내 뭍에 닿은 세월호를 만나려는 추모행렬이 전국에서 주말 내내 이어졌다. 세월호를 마주한 시민들의 반응 각양각색이었다. 노인들의 입에선 거친 말이 쏟아졌다. 부모들은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식들의 손을 꼭 쥐었다.

'바닷속 세월' 쌓인 세월호, 유가족 오열

세월호 유가족 70여명은 지난달 31일 새벽 경기도 안산에서 출발해 아침 무렵 목포신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남북으로 길게 세워진 3미터 높이 철책이 유가족들의 항만 접근을 막았다. 유가족들은 북문 입구쪽에 여섯 동의 천막농성장을 설치하고 세월호가 들어오는 모습을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시위에 나섰다.

유가족들은 철조망 너머 항만쪽에 서 있는 경찰과 마주 선 채 호소했다. 단원고 학생 고 오영석군의 엄마 권미화씨는 철조망을 흔들며 울부짖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나요? 마지막으로 엄마, 아빠를 불렀을 텐데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어요. 우리도 가까운 곳에서 세월호를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세월호는 이날 오전 7시께 전남 진도 동거차도 해역에서 반잠수식 선박에 올라 목포신항으로 향하는 마지막 항해에 나섰다. 105킬로미터 거리였다. 미수습자 9명의 가족들은 어업지도선에 올라 세월호의 마지막 항해를 함께했다.

해양수산부는 예상보다 기상 상태가 순조로워 당초 도착 예정시각보다 1시간30분 정도 앞당겨진 오후 1시를 도착 예정시간으로 발표했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유가족들의 항의가 격해졌다. 정부는 도착을 전후한 1시간만 참관을 허용했다.

유가족들은 항만 철재부두 쪽으로 나가 바다를 바라보며 주저앉았다. 낮 12시30분 무렵 옅은 바다안개를 뚫고 세월호의 모습이 드러났다.

곳곳에서 울음과 오열이 터져나왔다. 배가 가까워진 것을 알리는 경적도 구슬펐다. 세월호는 뱃바닥을 드러낸 채 부두로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유가족들의 울음도 깊어만 갔다. 바닷속 3년 세월이 남긴 흔적이 시시각각 실감으로 다가왔다. '정부 무책임'이란 맹수가 할퀴고 간 상처가 녹과 때, 찢긴 자국으로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한 유가족은 실신했다.

4·16가족협의회 인양분과장인 단원고 학생 고 정동수군의 아빠 정성욱씨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려 세월호가 우리에게 왔다”며 “9명의 미수습자들이 가족들의 곁으로 빨리 돌아가고, 아이들은 살아서 못 왔지만 선체조사를 통해 죽은 이유가 꼭 밝혀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 세월호 유가족이 지난달 31일 목포신항에서 울고 있다. 정기훈 기자
▲ 세월호 유가족들이 지난달 31일 목포신항에서 세월호가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목포=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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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오빠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나요"

도착 후 30분에 걸쳐 접안작업이 완료됐다. 1천81일 수학여행이 끝났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자를 위로하고, 세월호가 준 의미를 기리려 현장을 찾았다.

아이들의 손을 잡은 부모들이 특히 많았다. 목포에서 4년째 개인택시를 몬다는 박순기(47)씨는 하루 일당을 손해 보고 아들 태봉이 손을 잡고 세월호를 보러 왔다. 그는 “아들에게 세월호를 꼭 보여 주고 싶었다”고 했다.

“사드 배치로 인한 외교갈등에 박근혜는 구속되고 나라 꼴이 말이 아닙니다. 경제는 살아날 기미가 없고요. 세월호 절단 얘기가 나오는데 유가족들의 뜻에 맞게 선체조사 작업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세월호가 육지로 돌아온 것을 계기로 잘못된 많은 일들이 바로잡혔으면 좋겠어요.”

박씨는 “강원도에서 개인택시를 타고 온 사람도 있었다”며 “택시 요금만 50만원 넘게 나왔을 텐데 국민에게 세월호가 주는 의미가 그만큼 각별하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백발이 성한 어떤 할머니는 세월호를 보자마자 속사포처럼 걸쭉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가슴을 치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썩어빠진 문둥이 같은 놈의 새끼들이 저렇게 큰 배가 돌덩이 가라앉듯 쑥 가라앉지도 않았을 껀데 하나도 못 구했어야.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애들 다 죽였제. 화가 나서 못 있겄네.”

시민들은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색 리본을 철책에 매달았다. 리본에 “아이들이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대한민국이었으면 좋겠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박근혜가 주범이다” 같은 문구를 써넣었다.

우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이정민양을 대신해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이지우(15) 학생이 말했다.

"3년 전 친구들하고 갯바위 체험학습을 떠났던 날이었어요. 버스 안에서 세월호 소식을 듣고 모두가 엉엉 울었어요. 지금도 세월호에 탔던 언니, 오빠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높은 사람들과 정치인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이익이 아닌 국민을 위해 일해 줬으면 좋겠어요."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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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의 뺑소니 … "세월호는 현재 진행형"

세월호 도착 다음날인 1일 아침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목포신항을 찾았다. 세월호 육상거치 준비작업을 지켜보고, 미수습자 유가족을 만났다. 황 권한대행측은 유가족 대표자 선정을 요구했다가 유가족들이 준비하는 사이 몰래 현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연출했다.

단원고 학생 고 장준형군의 아버지이자 416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장인 장훈씨는 "2014년 4월 16일과 달라진 게 뭐가 있나"며 "그때도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체육관만 방문하고 도망갔는데 지금과 뭐가 다른가"라고 반문했다.

정부의 황당한 행동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유가족을 포함해 여러 시민들이 현장에 몰릴 게 뻔한데도 세월호 도착 당일까지 어떤 준비도 해 놓지 않았다. 도착 첫날 오후 늦게서야 목포시가 간이화장실을 설치한 게 전부였다.

정태관 세월호잊지않기 목포지역공동실천회의 상임공동대표는 “세월호 본체를 목포신항에 거치할 예정이라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려졌는데도 정부는 유가족과 시민들을 위해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았다”며 “유가족들이 맨바닥에서 지냈고, 오늘(1일)이 돼서야 자체적으로 컨테이너를 설치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오후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 등은 목포신항 북문 앞에서 '미수습자 온전한 수습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촉구대회'를 열었다. 박래군 4·16연대 공동대표는 “박근혜가 탄핵이 된 그날 맹골수도에서 세월호가 모습을 드러냈고, 박근혜가 구속된 어제 세월호가 돌아왔다”며 “하지만 황교안 권한대행은 유가족들과 대화 없이 현장을 뺑소니치듯 떠나고 유가족의 선체조사 참관을 거부하는 등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정부가 인양에 2개의 구멍만을 뚫기 위해 ‘상하이샐비지’를 선정했다고 했는데 140개의 구멍이 났다"며 "세월호가 무의미하게 훼손되려 한다"고 우려했다. 그는 "유가족들은 목포시민으로 1년을 살며 국민과 함께 세월호 진상규명을 이뤄 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와 유가족들은 이날 하루 두 차례 정해진 시간에 세월호 선체 정리작업에 참관하기로 합의했다.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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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훈 기자

인간 띠잇기' 포함 추모행사 잇따라

2일 오전에는 북문 앞에 목탁이 울리고 향불이 켜졌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가 ‘세월호 미수습자 수습 발원 기도법당’을 차렸다. 많은 시민들이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스님의 염불 소리에 눈을 감고 합장을 했다. 같은날 오후에는 목포지역공동실천회의가 '그립다 보고싶다'라는 주제로 세월호 추모행사를 했다.

1천여명의 시민들이 손에 노란 리본을 들고, 얼굴에 흰색 마스크를 썼다. 세월호를 막아선 철책 앞에 나란히 서는 '인간 띠잇기' 퍼포먼스를 했다.

오후 늦게 세월호가 누운 서해바다 위로 해가 졌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선미에서 선수를 타고 흐르는 노을을 지켜봤다. 그렇게 세월호가 뭍으로 돌아온 지 3일째가 저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결심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목포=양우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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