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대한변호사협회가 지난 23일 국회의원 전원에게 ‘변호사 보좌관 및 비서관 채용 요청’이란 제목의 공문을 보냈다.(조선일보 24일 6면) 변협은 공문에서 “준비된 인재를 원하시는 국회의원께서는 연락을 달라”며 “변호사가 국회의원 보좌관 또는 비서관으로 진출해 입법 과정을 보좌함으로써 청년변호사를 위한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경찰에 ‘경정’으로 특채됐다. 경정은 일선 경찰서장 바로 아래 과장급으로 꽤 중요한 자리다. 광역자치단체에도 5급 사무관으로 특채됐다. 그런데 요즘은 6급으로 가기도 힘들다. 몇 년 전 한 광역단체가 변호사를 7급으로 특채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변호사들이 항의하기도 했다. 전문가를 이렇게 낮은 직급에 뽑는 게 말이 되냐고.

이젠 변협이 직접 나서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청년변호사 채용을 요청하는 시대가 됐다. 사법·행정·외무고시는 개발독재 시절 계급상승의 주요 관문이었다. 국회의원 중에도 사법고시 출신들이 많아 이들을 ‘율사’ 출신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고시 출신들이 사법·행정·입법을 넘어 지방행정까지 장악해 병폐가 한둘이 아니다. 말단 9급 공무원으로 국민(민원인)을 직접 상대해 보지도 않은 책상물림들이 행정의 바닥과 근원을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줄서기에 바빴다. 박근혜 정부 내내 잘못된 정책에 ‘노(NO)’라고 말한 고위공직자가 드물다.

고시제도는 일제강점기 ‘고등문관시험’의 잔재다. 우리에게 고시제도를 선사한 일본도 고시를 폐지했는데 우리만 고시를 고수하고 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곧바로 ‘5급 사무관’이 된다. 사무관이면 일선 구청의 과장급 공무원이다. 구청에 가면 20대 과장 아래에 50대 팀장(6급)이 수두룩하다. 9급으로 들어오면 정년 때 잘해야 5급 달고 나가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5급들이 상전으로 앉아 뭘 하겠나. 서울시에 아는 5급 공무원 중엔 군대도 안 갔다 와서 이달에 군 입대를 위해 휴직하는 이도 있다.

한국일보 30일자 1면 머리기사는 <‘합격률 1.8%’ 슬픈 공시족의 나라>다. 한국일보는 1면에 이어 8·9면을 모두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슬픈 공시생을 조망했다. 한 공시생이 하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천막”이라는 말이 아프다. 고시 출신은 고사하고 9급이라도 공무원만 되면 좋겠단다.

수많은 대선주자들이 일자리 창출을 말하고, 최근 10여 년 동안 정부 정책은 일자리 창출을 위해 달려왔지만 직업공무원 만한 일자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모두 싸구려 일자리 숫자만 늘리는 정책이었다. 정부부처 고시 출신들이 하나 마나 한 이런 정책을 입안하고, 말단 공무원들은 되지도 않을 집계에 하세월이었다.

한편에선 기획재정부 같은 힘 있는 부처가 나서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아 온 것도 사실이다. 총액인건비제도에서 기준인건비제도로 무늬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공무원 숫자 억제다. 그 때문에 국회 청소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되는 길이 몇년째 막히기도 했다.

6~9급 일선 공무원 숫자를 대폭 늘리는 대신 고위직을 대폭 줄이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구청 관내에서 밤새 청소차를 타고 종량제봉투와 음식물쓰레기 같은 생활폐기물을 수거하는 노동자들은 99%가 용역회사 소속 저임금 노동자다. 지방행정에서 청소업무는 핵심 중의 핵심인데 사무실에 앉아서 결재만 하는 팀장·과장·국장이 왜 필요한지 모를 일이다.

중앙과 지방정부, 공공기관에서 일선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 간접고용된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돌리고, 대신 1~3급 고위직을 대폭 줄여야 한다. 중앙정부 부처마다 1급 숫자가 몇 자리 있느냐에 따라 부처의 힘을 좌우하는 판국에 뜬금없는 소리겠지만, 제대로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고위직 공무원을 본 적이 없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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