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용근 변호사(법무법인 시민)

아침 7시에 집을 나선 구보는 오늘도 초점 없는 눈빛으로 8시께 사무실 보안장치에 카드키를 대어 문을 열었다. 8시 반에 있을 회의자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장은 어제 안 만들고 뭐 했느냐 채근하는데, 부장 스스로 오늘 회의자료에 포함될 내용을 어젯밤 자정이 넘어서야 구보에게 보내 준 것은 잊어버린 모양이다.

아침 9시가 되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거래처와 인접 부서, 관계당국 등 세상 모든 사람이 구보만 찾는 것 같다. 구보는 전화통을 붙잡고 때로는 읍소를, 때로는 협박을, 때로는 사정을 한다. 일거리는 밀리기 시작하는데, 정작 일할 시간은 없다. 구보는 몇 달 전 정리해고로 일터를 떠난 동료들을 생각한다. 회사는 구보가 입사했을 때보다 몇 배 커졌지만, 회사 임원들은 매년 말 "내년에 위기가 예상되니 임금을 동결하자"는 말뿐이다. 신입사원도 언제부터인가 뽑지 않아, 구보는 막내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회사는 커지고 사람이 줄다 보니, 구보의 노동강도는 날이 갈수록 과중해지기만 했다. 헌법에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데, 지금 나는 행복한 것일까. 구보는 곱씹어 본다.

점심시간을 지나 해가 기운다. 오늘도 야근을 피하기는 틀린 것 같다. 미안한 마음으로, 하지만 어제와 별다를 바 없이, 구보는 아내에게 일찍 퇴근해 어린이집에 있는 아이를 데려올 수 있는지 물어본다. 아내는 어제도 일찍 퇴근했는데 오늘도 지금 나가면 영원히 집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투정인지 협박인지 모를 몇 마디 문구를 문자에 실어 보낸다. 구보는 결국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이 나라는 할머니·할아버지의 도움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나라일까. 구보는 씁쓸한 심정으로 어머니에게 재차 읍소한다.

어둑하게 땅거미가 내려앉은 도시의 밤에도 구보 사무실 불은 꺼지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전화는 오지 않지만, 정리해야 할 자료들이 구보의 책상에 널브러진 채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일터의 시계 속도는 구보의 일 속도보다 빠르다. 구보는 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나머지는 내일 해야지’ 하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되뇌고는 퇴근길 전철에 오른다. 오늘 구보의 노동시간은 식사시간을 빼더라도 13시간, 이 시간에 돌봄 노동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구보의 회사는 1년에 한 번 구보와 근로계약서를 쓴다. 계약서의 글자는 대체로 작지만, 기본연봉란 아래 있는 "기본연봉에 초과근로수당은 모두 포함돼 있다"는 내용은 특히 작다. 계약서에 소정근로시간은 주당 40시간으로 적혀 있지만 이미 구보는 오늘 하루만 열세 시간을 일했다. 인터넷 녹색창에 ‘초과근로수당’을 검색해 보니 임금의 50%를 가산해 준다는데, 근로계약서에는 왜 모두 포함돼 있다고 적혀 있는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데, 아무도 문제를 삼지 않으니 문제가 없는 것인가. 이런 것을 포괄임금제라고 한다던데, 이런 것은 원래 하면 안 된다고 하던데…. 구보의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구보는 근로기준법을 본 적이 없다. 배운 적은 더더욱 없다. 프랑스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노동법을 가르친다는데, 구보가 그동안 다녔던 그 어떤 학교에서도 노동법은 배울 수 없었다. 노동법에는 노동자 권리가 쓰여 있다는데, 노동법은 너무 멀고 일은 눈앞에 있다. 학교에서라도 가르쳐 주면 대충이라도 알 것 같은데, 정작 ‘노동법’이라는 법은 법제처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없으니 구보는 답답하다.

구보는 노조법을 본 적은 없지만, 노동조합은 안다. 몇몇 동료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 소식이 어떻게 회사 귀에 들어갔는지 기묘하게도 그들만이 정리해고 1순위가 돼 몇 달 만에 잘렸다. 그 일로 회사에서 노동조합은 금기어가 됐다. 하긴 노동조합은 무슨, 구보는 쓴웃음을 짓는다. 회사가 시행하고 있는 성과연봉제는 동료를 적으로 만들 뿐이다. 본인과 같은 직급에 있는 사람은 비교대상이고, 그들보다 높은 고과를 받지 못하면 본인 연봉이 칼같이 깎인다. 이런 판국에 노동조합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구보는 생각한다. 이런 삶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잠든 아이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는 없다. 노동자는 노동으로 삶을 꾸려 가는 존재일 뿐, 이것이 행복한 삶을 꿈꾸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법에 정해진 근로시간만큼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노동자로서뿐만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으로도, 사회의 구성원으로도 살아갈 권리가 있는 세상,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찾는 것이 회사에 대한 이해상반 행위로 평가받지 않고, 누군가의 도구로 연명하는 것이 아닌 본인 스스로 삶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구보는 지금까지 기다려 왔다.

그런데 오늘 밤만은 조금 생각을 달리해 보기로 한다. 누구도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 구보 앞에 내어 주지는 않으리라. 오직 구보들의 힘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구보는 이제 분명하게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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