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

나는 타자(他者)와 공감하기 위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욕망체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거나 밥을 먹고 싶다는 욕구는 누구나 겉으로 표현하지만, 예컨대 사랑받고 싶다거나 존경받고 싶다는 욕망은 대개의 경우 깊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기에 상당한 신뢰관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욕망체계가 상호 간에 이해되고 연결될 때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명제가 잠정적인 사실로 성립한다.

국어사전에서는 부족함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거나 그런 마음을 일컬어 ‘욕망’이라고 한다. ‘욕구’라는 단어와 의미는 비슷하지만 어감이 좀 더 강해서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지만 욕망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인 개념이다. 욕망은 인간의 인식과 행동의 동기를 규정하고 그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다. 우리 교과서에는 A.H 메슬로라는 심리학자의 연구를 빌려 인간을 1단계 생리적 욕구부터 5단계 자기실현 욕구를 가진 존재로 분석하는 삼각형 표가 등장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개개인이 가진 낮은 차원의 욕구는 긍정하지만, 심층적인 차원의 욕망은 부정적으로 보거나 아예 삭제하는 문화적 경향성이 강하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세우고 있다. 전자는 모든 인간과 동물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성질이다. 긍정하고 부정할 사안이 아니다. 배가 고프다는데 밥을 먹어야지 어떡하나. 그러나 후자는 좀 더 복잡하다. 인간의 가슴속에는 저마다의 우주가 있다는 말처럼 모든 개인은 고유한 자아를 가지고 있고 사회화 과정에서 복합적인 욕망체계를 발달시켜 나간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는 개개인의 다양한 욕망체계가 섬세하게 수용되는 사회로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중앙’ ‘집중’ ‘일사불란’ ‘총력’ 같은 권위주의적인 개념들이 역사적인 DNA로 축적돼 있고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개개인이 가진 심층적인 욕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수용하고 엮어 내는 데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결과론적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개개인의 섬세한 욕망체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보장하고 수용하는 데 실패한 국가공동체에서는 (차마 부끄러워서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돈’과 ‘섹스’만이 행복의 일반적 조건으로 통용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적인 행복도가 고구려나 신라의 백성보다 낮을 것이라는 데에 100만원을 건다. 그때는 가족도 있고, 왕도 있고, 신도 있었으니까.

지구라는 드넓은 별에서 하필이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에 탄생한 신생아는 성년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동안 다양한 공간에서 ‘자아가 간직한 섬세한 욕망’을 거세하는 훈련을 이어 간다. 놀이·관계 맺기·학습 같은 행위는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만 건강한 자아 형성에 기여한다.

그러나 이상의 행위가 ‘좋은 학교’라는 결과와 목적에 복무하는 형식으로 구현되면 그 효과가 상당하게 왜곡된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많이 하는 봉사활동도 마찬가지다. 개인은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보람과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 또한 ‘좋은 성적 혹은 취업’이라는 결과와 목적에 어쩔 수 없이 압도되는 경향성이 강하다. 당연히 자아효능감에 미치는 효과는 크게 반감된다. 기업의 모습도 교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직장생활을 5년 넘게 한 30대 초반 청년이 ‘나는 누구이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대체 뭘까’를 고민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강한 국가의 지배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먼 곳에 자리를 잡은 ‘시민사회 공동체’는 다른 모습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청년유니온 위원장 (cartney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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