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언론학자들의 흥미로운 논문을 묶어 만든 <두꺼운 언어와 얇은 언어>(박명진 엮음, 문학과지성, 2012)라는 책이 있다.

‘두꺼운 언어’는 대개 전문가들이 숙고·계산·선택하고 잘 다듬은 언어로 정책담론, 신문과 방송 드라마 등에서 나타난다. 반면 ‘얇은 언어’는 인터넷 등 소셜미디어가 등장한 ‘이후’의 시대에 활성화된 언어다. 기성의 세련된 언어에 비해 복잡한 전문가공 과정을 거치지 않고 생산된 즉각적이고 날것의 언어로 익명의 대중이 주된 생산자다. 탈이념의 상황에서 거대 서사가 해체되고 다수의 소수 이야기들이 번성하는 시대에 소셜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부상했다. 가볍고 모호하고 장난스럽지만 그럼에도 단단하고 생명력이 질기다.

두꺼운 언어는 주로 제도권이, 얇은 언어는 운동권이 주로 사용한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제도권과 운동권의 담론 대결장이었다.

제도권 담론은 조국 근대화를 내걸고 숫자와 과학을 근대화와 발전의 척도로 간주하고 주된 설명의 틀로 활용했다. 운동권 담론은 수치적 인식이 아닌 정서적 인식을 유도했다. 두 진영의 대결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두 진영은 표어나 구호를 즐겨 활용하고, 계몽적 방식을 즐겼다는 점에서 갈등하면서도 서로 닮아 갔다. 이렇게 두꺼운 언어와 얇은 언어는 겉으론 충돌하지만 공존해 왔다.

박명진은 이 책에서 후학들이 쓴 여러 편의 흥미로운 논문을 요약해 첫 논문을 채웠다. 박명진은 프랑스 파리3대학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에서 ‘기호학과 담론 분석방법론’을 오래 가르쳤다. 대표 저서로는 <비판적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성과와 그 쟁점>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레지스 드브레와의 대화록 <진보와 아방가르드의 붕괴>, 영국 비주얼커뮤니케이션 학자 앤드루 달리와의 대화록 <비주얼 문화>를 펴냈다.

요즘 언론학과에는 언론학 전공자가 거의 없다. 광고나 홍보도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돈 되는 ‘광고나 홍보’를 전공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박명진은 언론학을 제대로 공부했다. 그것도 프랑스까지 가서. 요즘 언론학의 핵심이 ‘커뮤니케이션(소통)’인데 박명진은 이미 1970년대에 프랑스에서 그 부문으로 학위를 받았으니 선구자다.

박명진이 우리 잡지사에 한 획을 그은 <뿌리깊은나무> 79년 9월호에 쓴 ‘텔레비전은 내용이 아무리 순해도 우리 아이의 성질을 사납게 만든다’는 짧은 기고만 해도 방송커뮤니케이션 전공자의 탄탄한 내공이 전해지는 훌륭한 소품이었다.

<두꺼운 언어와 얇은 언어>의 대표저자인 손병우 충남대 교수(언론정보학)는 이 책에서 “두 언어가 서로 공존·충돌하면서 우리 삶을 담론적으로 구성해 가는 복잡성을 분석하는 게 이 책의 목표”라고 밝혔다. 손병우는 박명진을 향해 “선생은 필자들이 자유롭고도 진중하게 공부하고 토론해 나가도록 북돋아 주시고 이끌어 주셨다. 특히 후학들이 문화 연구의 기존 패러다임에 갇혀 맴돌 때마다 그 장벽을 뛰어넘을 새로운 경로와 관점을 제공하는 논문을 통해 학문적 가르침을 주셨다”고 극찬했다.

이렇게 후학들에게 극찬을 받은 박명진은 이명박 정부 때 상당 기간을 방송통신위원회 산하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내며 표현의 자유는 물론이고 방송 제작자들의 자유로운 취재와 창작을 가로막는 여러 불편한 심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학문 안에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이고 엄정한 시선을 보였던 박명진은 현실사회에선 권력에 붙어 수많은 편협한 판단으로 언론자유를 훼손했다.

오늘날 박명진 교수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집행했다는 비판을 받아 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다. 박 위원장은 지난달 23일에서야 위원회 홈페이지에 “힘이 없었고 용기가 부족해 부당한 간섭을 못 막았다”며 뒤늦게 반성문을 올렸다. 만시지탄이다. 위원회의 사과문에도 문화예술계는 싸늘하다.(경향신문 2월24일자 8면)

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배운 대로 실천하지 않을까. 이 정도의 사과문을 올렸으면 위원장은 당연히 사퇴해야 하지 않는가.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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