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근혜순실 시대 국정농단과 부역의 끝판왕들이 호가호위하던 정권의 탄핵. 앙시앵 레짐(구체제)과 촛불항쟁이 부딪친 역사적 이중주의 일단락. 이제 다음 단계는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다 국민의 힘으로 권력을 상실하고 형사소추 대상이 된 박근혜 구속 여부와 적폐청산. 박근혜 일가가 대를 이어 누렸던 부귀영화에 만감이 교차하며 오버랩되던 필자의 앙상한 가족사. 마약투약 혐의로 구속됐던 그의 남동생과는 2002년 민영화 저지 발전파업으로 구속됐을 때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눴던 서울구치소 '빵동기' 사이. 일왕을 천황폐하로 지칭하며 신사참배 두둔하고, 태극기집회에서 망언을 일삼는 여동생까지 보니 친일과 독재의 후예들다운 면모. 위대한 아버지 다카키 마사오의 후광이 빛나는 가족사와 퇴진투쟁을 했던 흔하고 보잘것없는 필자의 가족사를 70년 엇갈린 현대사와 회한에 사무쳐 대비해 보는 양극단의 인생유전.

어마어마했던 그의 아버지와 무명의 필부였던 필자의 선친은 공교롭게도 1917년에 태어났다. 박정희 각하는 일제 강점기 다카키 마사오로의 창씨개명과 천황폐하께 혈서로 충성맹세를 했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한 대일본제국 군대 장교 출신이다. 8·15 이후에도 질긴 생명력과 권력욕의 정수를 보여주며 끝내 쿠데타를 통해 최고 권좌에 오른다. 18년간 철권통치를 하신 각하의 공과를 더 설명해 무엇하랴. 심지어 그 딸도 대통령이 된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가 아닌가. 친일과 독재 시대에 시혜를 받은 사람들의 대를 이은 충성은 끝을 모른다.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탄신 10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려고 했을까. 긴 설명이 필요없다. 친일파들이 일제 강점기가 끝난 후 70여년이나 누린 부귀영화가 자랑스러운 역사로 전승되는 마당에 뭘 더 말하랴. 친일파와 독재정권의 아바타들이 대를 이어 금수저를 세습하는 세상이니….

반면에 무명의 내 선친은 성리학 주리파의 선구자 회재 이언적 선생의 후손이다. 회재 선생의 손자이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끝까지 함께 싸운 후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생을 마감한 의병장 이의온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의온 장군이 지은 오의정이라는 정자와 직접 심은 향나무 한그루가 4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고향마을에 정정하다.

한말 전멸한 ‘산남의진’ 의병장 이한구 선생도 집안 어르신이다. 산남의진은 필자의 고향마을에서 몽땅 잡혀 1차 해산을 당하고, 다시 결집해 일제와 싸웠으나 결국 의병 전원이 몰살당했다. 고향 땅에서 견디지 못한 필자의 조부는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무장항일투쟁을 하던 독립운동가의 동생인 어머니와 선친을 봉천성에서 결혼시킨다. 해방 후 필자의 외가는 중국에 남았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상봉하지 못한 이산가족이 됐다. 울화를 조용히 술로 달래던 선친을 이해하는 데에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대부분 그랬듯이 쫄딱 망한 집안이었다. 이른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3대가 고생한다는 경로 그대로 70여년이 흘렀다.

찢어진 가난이 유산이고 한이 유일한 상속이어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 시대 그런 집안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다만 왜곡된 역사와 훼절자들의 희한한 당당함이 혈압조절을 힘들게 할 뿐.

마약사범 파란 명찰이 빛나던 박정희 각하의 아들을 감옥에서 만났을 때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던 날에도 회한에 사무쳤다. 입안에서 맴돌던 “이게 나라냐?”는 결국 1천700만 촛불이 한반도를 밝힐 무렵 국민의 입에서 입으로 터져 나왔다. 적폐청산 구호가 우렁찬 광화문 네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이번에는 꼭 역사가 바로 세워지기를 소리 없이 빌고 또 빌었다. 조카들과 딸만큼은 바른 역사를 물려주고 한을 상속시키지 않게 되기를 소리 없는 울음으로 염원했다. 세상일 내 뜻대로 되랴마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거리에 나서 외쳤을 뿐. 앙시앵 레짐을 혁파하고, 역사가 바로 기록되고 교육되며, 노동자 민중의 기본권이 온전히 향유되는 나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 노동자들이 내 나라로 부를 수 있는 나라.

촛불항쟁은 그런 명예혁명이기를 빌고 또 빌었다. ‘혼이 비정상’이던 친일과 독재의 아바타 박근혜가 파면됐다. ‘우주의 기운’으로 부정축재와 권력농단을 일삼았던 순실섭정 시대가 갔다. 일제 강점기를 포함해 100년의 훼절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부끄러운 한 시대가 종막을 고했다. 만시지탄이지만 역사적 재평가와 청산의 현실화, 미래지향적 설계가 이어지길 기대한다. 정치적 담합을 통한 대통합 운운하지 말고 노동자 민중의 피맺힌 가슴과 투쟁이 역사로 전승될 수 있기를 바란다.

구체제의 홍위병들이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모독하며 불복종의 태극기를 흔들어 대도 새로운 사회를 향한 신체제 형성 과정에 멈춤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앙시앵 레짐과 촛불항쟁의 앙상블 없는 이중주는 끝났다. 역사적 분별 없이 이어진 시대의 청산 과정에서 불가피한 소음을 감내해야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100년 현대사의 적폐들은 앙시앵 레짐의 얼굴 박근혜와 함께 역사의 강물에 미련 없이 흘려보내기를. 한 세기 동안 친일과 독재에 신음하고 그 야누스적 행태를 극복하기 위해 피눈물 흘렸던 모든 희생과 헌신에 따뜻한 박수를.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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