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승리의 주문이었다. 지난해 10월29일부터 매주 토요일이면 촛불을 들고 외쳐 왔던 ‘박근혜 퇴진’의 구호가 이 나라에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2016헌나1호 사건에 관해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이정미 재판관이 결정 요지를 말하는 걸 생방송으로 지켜보던 국민들은 촛불집회가 마침내 위대한 승리를 이뤄 냈다고 환호했다. 2017년 3월10일 11시21분이었다. 19차례의 촛불집회를 통해서, 광화문광장과 전국 주요도시의 광장에서 연인원 1천500여만명이 참여해서 이뤄 낸 승리였다.

2. 촛불시민의 승리였다. 박근혜 퇴진을 위해 광장에 쏟아져 나와 행동했던 국민의 승리였다. 촛불광장에서 거대한 국민의 분노가 지난해 12월9일, 국회에서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 소추하도록 하고서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전원일치 파면 결정에 이르게 했다. 그러니 대한민국 국민 만세를 불러 마땅한 날이다. 촛불시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는 이 새봄, 박근혜 없는 봄을 만끽할 자격이 있다. 한국현대사에서 이토록 위대하게 쓴 국민 승리의 날이 얼마나 될 것인가. 언론은 외신을 뉴스로 보도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즈는 한국인이 자랑스러움을 느껴야 한다고 평가했다고 보도했다는데, 분명히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자랑스럽다. 지난 11일, 매주 토요일 열리는 정기 집회로는 마지막이라는 20차 촛불집회에서 촛불시민들은 스스로 자랑스럽다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촛불시민으로서 이 승리가 너무도 자랑스럽다. 이 외신은 “대중의 분노에 응답하고 정당한 법 절차에 근거해, 한국이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번창한 나라라는 신뢰를 강화했”고, “전세계에서 위협을 받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에 힘을 실었다”고 사설을 달았다고 보도됐다. 국내외에서 앞다퉈 오늘을 대한민국 국민이 이뤄 낸 승리의 날이라고 보도하고 있지만, 설사 누가 평가해 주지 않아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오늘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 역사에 위대한 국민 승리의 날로 기록될 것이다.

3. 노동자도 있었다. 촛불시민의 승리이고, 국민의 승리였고, 거기 노동자도 있었다. 거기서 노동자도 촛불시민이고, 국민이었으니, 그 승리도 마땅히 그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의 승리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위대한 노동자의 승리라고는 외신은 물론이고 어느 언론도 보도하지 않았다. 촛불시민 중에서도 노동자는 압도적인 다수였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노동자는 1천만명을 훨씬 초과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다수로 촛불을 들었어도 촛불노동의 승리라고는 말하지 못하는 승리였다. 뭐 이 촛불시민혁명이라 불리는 국민 승리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걸 노동의 승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나는 말하고 있을 뿐이다.

4. 광장은 민중총궐기로부터 시작됐다. 위원장 한상균이 구속될 정도로 민주노총은 민중총궐기대회를 주도해 왔다. 이 나라에서 민중총궐기는 민주노총을 빼놓고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해 박근혜-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 사태가 폭로되면서 타오르기 시작했던 촛불집회도 초기에는 민중총궐기로 전개됐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주최단체로서 촛불집회를 개최해 왔지만, 그 퇴진행동의 주요 참여단체가 민주노총이었다. 그런데 독자적 대오는 아니었다. 노동자가 국민에 파묻혔고 민주노총 등 노동자단체도 비상국민행동의 이름으로 광화문광장의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그러니 위대한 촛불시민혁명에서 노동자운동도 박근혜 퇴진을 위한 국민행동에 파묻혔다. 거기서 기를 쓰고 노동문제를 내세우려고 외쳤지만 촛불광장은 노동의 광장은 아니었다. 촛불집회의 광장은 노동의 광장은 아니었다. 광장의 노동자는 사용자 시민과 함께 촛불시민으로서, 헌법 제1조를 노래한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5. 국민행동이었다. 국민의 직접행동이라고 말했다. 분명히 20차례의 촛불집회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노래하며 광장과 거리에서 행동했다. 직접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국민의 행동 앞에 노동운동은 무방비였다. 프랑스 시민혁명, 파리코뮨 등 노동자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주인과 노예, 주인인 권력과 이에 복종하는 인민의 문제였다.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세상, 노동자세상을 위한 노동자운동도 이 민주주의 문제의 해결로 실현돼야 했다. 경제는 물적 토대이고 소유의 문제였고, 정치는 노예가 주인이 되는 권력의 문제였다. 그리고 물적 토대가 상부구조 정치를 궁극적으로 규정한다고 노동운동은 철학했지만, 인민이 주인되는 민주주의야말로 그 물적 토대를 소유의 독점에서 벗어나 민주적으로 재편할 것이라고 노동운동은 정치했다. 직접민주주의는 감히 부정할 수가 없는 노동자의 민주주의였다. 그것은 노동운동의 미래, 정치일 수밖에 없었다. 단지 수만·수천만이 직접 참여하기 어려워 불가피하다고 대의제를 내걸었을 뿐이다. 그래서 소환되는 대표제, 기속되는 대의제를 노동의 정치로 봤다. 그렇지 않은 것은 노동의 정치가 아니었다. 인민이 지배하는 민주주의야말로 노동의 정치인 것이고 촛불집회는 국민이 광장에서 직접 행동하는 민주주의였다. 그러니 오늘 촛불광장은 혼동의 광장이었던 것일 게다. 노동운동에겐 그것은 국민의 직접행동으로 장차 노동의 정치로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이 혼동이 광장에 노동자를 방치한 것인가. 이렇게 촛불집회를 들여다보자니 너무 거창해진다. 어찌 보면 이 나라에서 국민은 이제 겨우 주권자로서 인식하고서 그 몇 걸음을 내디딘 것에 불과한 촛불행동을 두고서 말이다. 그래도 나는 거창하게 말하고 싶다. 자꾸만 쪼그라들고 있는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이 나라의 촛불집회가 새로운 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시작되는 때부터 촛불집회가 국민의 위대한 직접행동이기를 바라고 바랐다. 누구는 혼란이라고 말하고, 빨리 박근혜 퇴진이 이뤄져 더는 촛불집회가 열리지 않는 날이 와야 한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혼란이 아니라 국민이 스스로 주인으로 행동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환호했다. 하지만 오늘의 광장은 국민의 직접행동의 광장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국민은 광장에서 촛불집회로 행동했지만, 그건 국회의 의결과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박근혜를 탄핵해서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 앞에서 “대중의 분노에 응답하고 정당한 법 절차에 근거해, 한국이 전세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번창한 나라라는 신뢰를 강화했”고, “전세계에서 위협을 받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에 힘을 실었다”는 외신의 평가를 그게 아니라고 너희는 우리를 모른다고 강력히 비판하기가 어렵다. 대표제·대의제를 부정한 국민행동이 아니라 대표제·대의제가 제대로 작동하게 한 국민의 행동이었다.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 대의주의의 완성이었다. 촛불집회라는 “대중의 분노”로 철저히 헌법과 법률의 “절차에 근거”해서 대통령 탄핵을 이뤄 냄으로써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번창한 대의민주주의를 실현해 냈다고 말해도 어쩔 수가 없다. 그렇더라도 스스로를 부정하지 말자. 분명히 1천500만명이 넘는 국민이 촛불을 들고서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행동했고, 그것이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탄핵할 수 있게 했다. 이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국민행동만으로도 위대한 대한국민이라고 우리는 자부해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노동자타령하는 나는 아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엄청난 촛불의 광장에서 이 위대한 민주주의의 투쟁에서 노동운동이, 노동자가 노동의 민주주의로 폭발하지 못했다는 것이 나는 아쉽다고 말해야 한다.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우리의 노동자는 아직 자신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모른다. 대의제·대표제를 넘어서 노동자 자신이 주인되는 민주주의를 알지 못한다. 노동자의 일터 작업장에서도, 심지어 노동조합 등 노동자단체에서도 대의제·대표제가 실현될 뿐이니 노동자는 오늘 촛불광장에서 위대하다는 국민의 직접행동이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앞장서 외쳐 투쟁할 수가 없다. 광장은 뜨거운데 작업장은 차갑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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