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주님, 저는 왜 해외여행 한 번 못 가 보고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나요." 한 엄마가 이런 기도를 하면서 울었단다. 그 얘기를 들은 또 한 엄마는 그 기도를 하며 울었다는 자신의 친구가 안쓰러워 울었단다. 자신의 친구가 우직하게 착하고 부지런한데 왜 이 나라에서는 길이 안 보이는 건지,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친구와 함께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단다.

글을 읽으며 내 마음이 참 따스했다. 우정이 훈훈해서였다. 그렇지만 한구석은 아렸다. 한국 사회 도대체 왜 이런가.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화가 솟구쳤다. 이런 사회에서 제구실 못하는 우리 운동에게, 또 내 자신에게….

나와 너, 우리, 아직 송파 세 모녀를 기억하는가. 구의역 김군은 기억하는가. 얼마 지나지 않은 사건이라 기억하고 있다고? 아니다. 우리는 이미 잊었다. 이기적인 머리로 기억하고 있는지 몰라도, 따뜻하고 감성적인 연대의 심장으로는 벌써 다 잊었다. 그렇게 우리의 심장에서 사라진 일이 또 있다. 한 복지관 독서실 사물함에 붙었던 메모 말이다. 독서실 이용자가 자신의 사물함에서 과자와 간식이 사라지는 걸 발견하고서 그러지 말라는 메모를 남겼는데, 거기에 한 메모가 붙었다. CCTV로 확인하니 작성자는 중학생 또래 여학생이었다. 메모 내용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거지라서 훔쳐 먹었어요. 죄송해요. 제가 어찌어찌해서 독서실 비밀번호를 알아 가지고. 독서실 사물함 한 번 열어 봤는데 맛있는 게 있어서 저도 모르게 손이 갔어요. 정말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부모님이 많이 바쁘셔서 동생들을 대신 돌봐야 하거든요. 그래서.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오겠습니다.”

메모를 써서 붙이면서 소녀는 얼마나 마음 졸이며 슬펐을까.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지는 않았을까…. 소녀의 집이 어떨 것인지 복잡하게 추측하지 않아도 금방 그려질 것이다. 밑바닥 노동자나 영세상인 등의 아이 아니겠는가. 밑바닥은 이렇게 살고 있다. 송파 세 모녀와 구의역 김군처럼 그렇게 죽어 가고 있다.

소녀의 사연을 전하며 복지관은 이렇게 말했다. “생리대 살 돈 없어 신발 깔창, 휴지로 버텨 내는 소녀들의 눈물. 생활고에 못 이겨 집세와 공과금만 남기고 동반자살했던 세 모녀. 인공지능과 인간이 대결을 하는 첨단의 시대에도 처절한 빈곤과 배고픔은 여전하다.”

그렇다. 한국 사회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아니, 상위 10%나 20%에겐 천국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운동이 주목해야 할 밑바닥에겐 지옥이다. 우리들의 자식세대인 청년들에게도 지옥이다.

2012년 기준으로 한국의 상위 10% 소득집중도는 44.9%였다. 나머지 55.1%로 국민 90%가 나눠 먹었다는 의미다. 미국 다음으로 소득집중도가 높은 불평등 국가였다. 그랬는데 더 벌어졌다. 노동자 상위 10%와 하위 10%의 임금격차가 2014년 5.00배에서 2015년에 5.25배로 벌어지더니 2016년엔 5.63배까지 가파르게 벌어졌다. 곧 나올 올해 통계가 두렵다. 어디 그뿐인가. 지난 10년간 2인 이상 노동자 가구에서, 소득 상위 20% 임금은 252만원 증가했는데 하위 20%는 41만원 오르는 데 그쳤다. 성별 임금격차는 남성 100일 때 여성 64로, 경제협력개발국가(OECD) 34개 국가 중 최악이다.

참담한 통계는 또 있다. 현대자동차 매출액이 1% 증가하면, 1차 하청 매출액은 0.43% 증가한다. 2차 하청은 0.05%, 3차 하청은 0.004% 증가에 그친다. 삼성전자도 매한가지다. 삼성전자 매출액이 1% 증가하면, 1차 하청 0.56%, 2차 하청은 0.07%, 3차 하청은 고작 0.005% 증가한다.

노조를 만들어 투쟁하라고 하는데, 밑바닥 주변부 노동자들은 임금을 더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 없는 구조에 처해 있다. 여기다 지난해 청년실업률은 9.8%로 역대 최고치였다. 마지못해 들어간 비정규직과 이직 희망자 등을 포함한 청년 체감실업률은 34%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끔찍하다.

이 문제를 대체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이런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이 운동 아닌가. 투쟁을 통해 바꾸자고? 그래 맞다. 투쟁을 통해 바꿔야지. 그런데 어떤 투쟁을 통해서?

최근 우리 노동운동만 생각하면 삼국지의 장비가 떠오른다. 장비는 머리를 굴릴 줄 모르고 창만 휘둘러 대다가 부하의 손에 죽었다. 우리가 영락없는 장비 아닐까. 화염병이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총파업이면 다 될 줄 알았다. 세상이 변하고 조합원 처지가 변하고 계급의 상태가 변하는데도, 우리는 그러고 있었다.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세상은 더 악화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필시 우리 노동운동이 청년세대 손에 죽을 것이다. 이미 청년세대와 밑바닥 주변부 노동자들로부터 상당히 멀어졌다.

쇠파이프와 화염병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미 쌍용자동차 투쟁 때 확인했다. 다시 돌아온다 해도 상당한 기간은 어려울 것이다. 총파업 또한 조직되지 않을뿐더러 위력도 없다. 박근혜 퇴진 국면에서 전개된 총파업조차 초라했고 감동을 주지 못했다.

뭔가 다른 방도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하나의 방안으로 ‘사회협약 체결운동’을 제안한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가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노·사·정부뿐 아니라 불공정·양극화로 고통당하는 청년·노인·여성·자영업자 등이 모두 참여하는 사회적 협약 테이블을 말하는 것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수임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과 하청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틀을 말하는 것이다. 투쟁을 통해 쟁취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정부와 국회를 대상으로 한 청원운동과 로비스트운동으로 전락한 우리의 궁상맞은 노동운동을 극복하자는 뜻도 있다.(다음 칼럼에 계속)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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