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노동 존중’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다가 이젠 보통명사가 된 것 같다.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위해 뭘 하겠다는 말 같기는 한데, 솔직히 공허하다. 노동 존중을 이야기하는 정치인들이 일자리, 즉 고용 문제만 말하지 노동 문제엔 침묵한다는 비판도 있다.

‘노동 존중’이란 무엇인가. 일을 존중하겠다는 건가. 일을 하는 노동자를 존중하겠다는 건가.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을 존중하겠다는 건가.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와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모인 노동조합을 존중하겠다는 건가. 이 모두를 존중하겠다는 뜻 같은데, 그렇다 보니 노동 존중의 내용을 파고들면 일목요연하지 않고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대통령을 꿈꾸는 후보들은 노총이나 산별노조가 들이미는 내용을 자기 공약으로 수용해 집권하면 실현하겠다고 약속한다. 노동조합이 요구하는 공약에 동의하고 그 실현을 위해 애쓰는 게 노동 존중인가. 누구는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좋은 일자리는 누가 만드는가. 노동력을 사서 쓰는 자본가가 만드는가. 좋은 정치인이 만드는가. 좋은 정당이 만드는가. 국회에서 만드는 법과 정부가 집행하는 정책이 만드는가. 본질적으로 좋은 일자리란 무엇인가. 역사를 돌아볼 때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노력과 집단적인 참여 없이 좋은 일자리 창출이 가능했던가.

“일자리는 늘어나고, 근로시간 단축되고, 해고요건 강화된다.”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가 약속한 공약이다. “앞으로는 비정규직도 임금·상여금을 똑같이 받게 된다.” 역시 박근혜의 공약이다.

“장애인 채용을 확대하고 (…) 경찰 인력을 늘리고 수당도 인상한대. (…) 암을 비롯한 중증질환 진료비는 100% 국가가 부담하고 (…) 소득맞춤형 반값 등록금에다 (…) 고금리는 저금리로 바꿔 주고 신용회복을 지원해 준다는데. (…) 고교 무상교육은 단계적으로 실시하고, 노인들에게 최대 70만원 근로장려금 지원하면서 (…) 중소기업을 정부가 확실히 보호하고 (…) 스펙 아닌 잠재력과 열정으로 인재를 채용해 (…) 대형유통업체의 골목상권 진입을 확 규제해 버린다는구먼!”

모두 박근혜가 약속한 것들이고 ‘노동 존중’에 직간접으로 관련된 것들이다. 이 공약 가운데 제대로 이행된 게 없다. 문재인도 비슷한 것들을 공약으로 내놓았는데, 그가 대통령이 됐더라면 제대로 이행됐을까. 2017년 봄 여러 대선캠프에서 쏟아 내는 ‘노동 존중’ 공약은 도떼기시장에 가깝다. 붐비고 혼잡스럽고 시끌벅적하기만 할 뿐 질서도 없고 방향도 안 보인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터 군사독재자 박정희와 ‘정치·경제·사회적 금치산자’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입으론 ‘노동 존중’을 반대한 이가 없다. 김대중·노무현 ‘보수야당’ 집권기 10년을 거칠 때도 ‘노동 존중’은 강조됐다. 모두 앙꼬 없는 찐빵이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했다. 공약이 수십 개든 수백 개든 그것을 관통해 한데 묶는 핵심이 있어야 한다. 구슬은 많은데 꿸 줄이 없으면 제값을 받을 수 없다.

‘노동 존중’의 앙꼬는 무엇일까. ‘노동 존중’이 약속하는 구슬을 한데 엮어 낼 심줄은 무엇일까. 그 답은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을 명시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87호와 98호를 비준하는 데 있다. 아울러 강제노동을 금지한 29호와 105호 협약도 비준함으로써 ILO의 핵심노동기준(기본협약 8개)에 대한 정치적 승인 절차를 완료해야 한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기본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누리고 있을 거란 착각이다. 엄밀히 말해 2천만 노동자 가운데 노동 3권을 제대로 누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87년 노동 체제’의 결정적 약점은 노동기본권이 헌법 조항으로만 존재할 뿐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데 있다.

문재인의 130만개 일자리 창출, 이재명의 장시간 노동 금지, 안희정의 공정한 시장 조성, 안철수의 격차 없는 사회, 심상정의 노사공동결정제도, 유승민의 육아휴직 3년, 박원순의 노동존중특별시라는 구슬이 보배가 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구슬을 꿰맬 심줄이 있어야 한다.

‘노동 존중’은 노동자들이 자본과 국가 같은 사회적 강자에 의해 ‘존중’받아야 하는 약자 코스프레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실현될 수 없다. 노동자들이 단체로 모여 집단으로 교섭하고 행동함으로써 스스로를 사회적 강자로 만들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조직 노동(organised labour)이 사회적 강자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는 법·제도를 개폐하는 것이야말로 ‘노동 존중’의 첫걸음이다. "ILO협약 87호와 98호를 비준하겠다"는 공약은 '노동 존중'을 실천할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리트머스시험지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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