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외교부가 부산 주재 일본총영사관 앞 소녀상을 이전하라고 부산 동구청에 공문을 보내 논란이 일었다. 시민들은 어느 나라 외교부냐고 정부를 성토했다. 부산 동구청도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여러 언론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소녀상이 처음 설치된 건 2011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이다. 여성가족부가 종로구에 협조를 구해 소녀상을 설치했다. 하지만 명확한 관리규정은 없다. 최근 서울 종로구가 소녀상 관리방안을 마련하려고 한다. 종로구의회에 상정된 ‘종로구 도시공간 예술 조례’ 개정안이 4월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다. 개정안은 종로구 관내 공공조형물을 구청이 관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녀상 논란에서 가장 독특한 시각을 보여 준 신문이 있다. 중앙일보는 지난달 8일자 ‘소녀상이 준 재일동포 고통도 헤아려야’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일본의 성범죄는 규탄받을 문제지만 “항의의 뜻이라고 일본총영사관 코앞에 소녀상을 세우는 것이 과연 현명한가는 또 다른 문제다. (중략) 양국은 또 북핵을 비롯, 눈앞에 닥쳐온 안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힘을 보태야 할 처지”라고 했다. 중앙일보 사설은 욕먹은 우리 외교부와 같은 입장이다. 소녀상 설치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설치 위치는 외교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

마침 한 지상파가 지난해 말 한일협상에 이면합의가 있었다는 의혹을 탐사 다큐로 방영했다. 외교부는 소녀상 이전 공문으로 막힌 한일관계를 풀어 보려 했지만 일본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이처럼 우리가 외국과 갈등할 때마다 뜬금없이 이상한 논조를 자주 보였다. 김대중 정부 초기인 1998년 청와대는 박주선 법무비서관 주재로 국가기강 확립대책 실무협의회를 열고 정치인 사정에 나섰다. 부정부패를 ‘국가 존립 저해 범죄’로 규정하고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는 정치인·관료·경제인 비리를 엄벌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청구그룹 사건 비리, 공천 비리 등과 관련해 현역 국회의원 10명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국회로 보냈다. 당시 여야 중진이던 정대철·이기택씨도 각각 구속되거나 불구속 기소됐다. 국제통화기금(IMF) 환란 수사와 관련해 강경식 전 부총리·김인호 전 경제수석도 구속됐다.

사정 한파가 몰아치던 98년 9월19일자 중앙일보는 뜬금없이 ‘굳세어라 클린턴’이란 제목의 워싱턴 특파원 칼럼을 싣는다. 르윈스키와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클린턴 대통령의 추태마저도 미화시킨다. 칼럼은 클린턴에게 그런 일에 구애받지 말고 대통령 사임일랑 생각조차 말고 꿋꿋하게 버티라고 주문한다. 당시 중앙일보는 국내 정치 사정 논란에 ‘표적 사정’ 또는 ‘야당 탄압’이라며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입장을 여과 없이 수용하면서도 미국에 대해선 대통령(클린턴)의 안위를 걱정했다.

중앙일보 98년 9월15일자 ‘국회의원을 수입하면’이란 제목의 편집부국장 칼럼은 정치인 사정을 둘러싼 여야 공방 속에서 “미국이나 영국 의회에서 일류 가는 정치가를 수입, 국정 운영을 맡기면 값이 좀 비싸더라도 전체 국가 이익을 따지면 더 싸게 치르는 게 아니냐”며 경쟁력이 떨어지는 한국 국회의원들은 모조리 수입 대체해 버리자고 주장한다. 사대주의는 물론이고, 정치 혐오도 부추기는 칼럼이었다.

98년 9월18일 서울 명동에서 ‘국회 파행, 누구 책임?’을 시민에게 묻는 거리 즉석 여론조사가 있었다. 결과는 압도적으로 야당인 한나라당에 있다는 응답이 많았다. 그런데도 우리 언론은 기계적 중립을 내걸고 양비론을 앞세운다. 양비론은 중립이 아니다. 철저하게 어느 한쪽을 편드는 편파보도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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