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먹고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고, 먹고사는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일'이다. 일의 내용, 일의 질 그것이 곧 사람의 삶이고 행복 그 자체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가 시작되면서 노동유연화가 가속화했다. 그 첨병은 파견노동·간접고용·계약직 등 비정규직의 확대였다. 경제를 살리자는 명분이었으나 그것은 기업 살리기요, 노동자 죽이기였다.

노동자 죽이기란 곧 국민 죽이기와 다름 아니다. 2천만 노동자 시대이므로 일할 수 있는 국민 중 절대 다수가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전체 노동자 중 비정규 노동자가 절반에 육박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전 국민 한 집 건너 한 집이 비정규 노동자인 셈이다.

그러니까 지금 대한민국 국민의 '일'은 보편적으로 형편없고 따라서 대다수가 충분히 행복하지 않거나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노동이 민생이고, 노동정책이 민생정책이며, 노동운동이 일반적인 민생운동이라고 선언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에서는 위장도급·특수고용 등 신종 바이러스 같은 악성 비정규직이 다종다양하고도 강하게 노동시장에 확산되고만 있다. 그 바이러스의 근원적 숙주를 제거하지 않고 변죽 울리며 잔풀만 제거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잔풀 제거란, 개별 사업장에 대한 근로감독 또는 소송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잔풀 제거마저도 시원찮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헌법에 근거한 대수술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32조는 '근로'를 모든 국민의 권리로 규정하면서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고용형태에 관한 법률은 정규직이 아닌 특수한 형태에 관한 것들뿐이다.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과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이 대표적이다. 계약직·단시간 알바·파견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법이다.

정규직에 대한 특별 법률은 없다. 즉 헌법 및 하위 법률의 입법구조와 취지를 보더라도 고용형태의 원칙은 직접고용 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은 특정한 필요가 있을 때 법률이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다.

전통적 법원칙은 예외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엄격히’ 판단해 어긋나는 경우 원칙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형식적 최고 합리성을 국가와 사회로부터 공인받은 '법원'을 살펴보자. 우리가 왜 실질적으로 정규직인지, 그리고 왜 정규직과 같이 대우받아야 하는지를 노동자가 엄격히 입증해야 한다. '진실의 무결성'이라는 법언(法言)이 있다. 진실에는 사소한 논리적 모순도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논리학의 '대우명제(對偶命題)'에 따라 다시 해석하면 “사소한 논리적 모순이 발견되면 진실이 아니다”는 의미다.

그런데 법원은 위장도급 증거가 여럿 발견되고 특수고용 노동자에게서 근로자의 실질이 다수 입증돼도, 일부에 불과하다거나 사용자가 선택한 고용형태가 해당 산업 특성상 불가피하다는 등의 표현으로 허위진실을 옹호한다. 법원 판결문 몇 문장은 매우 편리하게 종결되지만, 고통을 종결짓고자 법원을 찾은 노동자는 더 큰 싸움을 준비해야만 한다.

헌법 32조에서 말하는 근로조건에 있어서의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일까. 그 대답은 너무 어려우므로 단 한 가지 질문에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해 보자. 동일한 방식과 내용의 일을 하는데 고용형태와 받는 돈에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에 맞을까? 그 차이가 천양지차라면? 이는 존엄과 거리가 멀다.

회사 사장도, 판사도, 보수정치인 고관대작들도 비정규직으로 그런 큰 차별을 직접 겪을 기회가 있다면 퇴근길에 자신이 존엄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 법률에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명시하고, 합법도급 혹은 개인사업자 실질에 어긋나는 모순이 발견되면 원칙으로 돌아가서 직접고용 노동자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비정규직 체계를 합리화하는 근거는 많다. 경제를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일자리를 만들기 위함이다, 해당 산업 유지를 위해 필요했다 등등. 그러나 간접적 근거투성이고, 논리개발의 동기 자체가 대놓고 기업 편향적이다.

원인이 설명된다고 결과를 승인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특수고용 노동자가 계약내용을 알면서도 개인위탁계약서에 서명했다고 치자. 또는 위장도급 요소가 발생된 것은 원청 입장에서는 일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측면이 있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불법적 실질이 합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세상을 만든 것이 궁여지책이었다는 지난 정권 위정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논쟁할 이유가 없다. 여하간 지금 이 “헬조선”이라 불리는 차별과 불공정 경쟁의 불구덩이를 승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건대 노동이 민생이다.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는 역사적 기회에 특히 비정규직 노동문제에 칼을 들이대지 않는다면 백년을 기다려도 흐린 물은 맑아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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