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항쟁으로 요동치는 권력 재편기에 민주노총은 정치세력화 방침을 세우는 데 실패했다. 지난 대의원대회에서 여러 안이 논의됐으나 모두 부결됐다. 초라하고 무기력한 민주노총의 민낯이 드러났다. 겨울 내내 터져 나온 촛불 항쟁에 불쏘시개는 됐으나 그 불길을 선도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의 지난한 투쟁과 희생으로 건설한 과거는 찬란했으나, 노동운동 주체로서 산업적 시민권의 쟁취, 즉 제도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귀한 시간을 까먹고 있다. 현실 흐름을 주도하지 못하고, 공허한 논쟁에 쓸데없이 힘쓰다 사회변화에 뒤처진 자기 업보다.

민주노총의 진로에 장애물을 놓은 공허한 논쟁의 대표적인 사례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2014년 지도부 직선제 실시와 2005년 노사정위원회 참가 실패다. 직선제 문제부터 살펴보자. 조합원들의 참여는 활발해졌는가. 정파 문제나 관료주의는 개선됐는가. 노조 민주주의는 강화됐는가. 노동운동은 혁신됐는가.

누차 말하지만, 이러한 과제와 전국 중앙 노총의 지도부를 직선제로 뽑는 문제는 별 상관이 없다. 우수한 자질의 활동가가 없다면, 조직이 가진 자원이 풍부하지 않다면, 운동의 이념과 노선이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다면, 가장 중요하게는 조합원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공식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3년이 아니라 매년 위원장을 갈아 봤자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이다.

민주노총 운동의 위기는 위원장 직선제를 실시하지 않아서 온 게 아니다. 현장-지역-산업-중앙을 가로지르는 노동조합 조직의 모든 단위에서 조합원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요구를 실현하는 대의(代議)·대변(代辯) 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그리고 민주노총으로 조직된 조합원 이외의 노동 세계(world of work), 즉 한국노총 조합원과 90% 미조직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이해가 부재한 것도 중요한 이유다. 산토끼로 헤매는 90%의 노동자에게 파고들어 그들을 보듬는 노동운동이 되지 못하고, 울타리 안의 집토끼 5%에만 집착하는 자기만족적(complacent) 노동운동으로 전락한 것이다.

민주노총의 진정한 혁신, 정파 문제와 관료주의 개선, 그리고 노조 민주주의 강화를 바란다면 자기만족적 직선제에 돈·인력·시간을 쏟아붓기보다는 조합원과 현장 간부의 의견과 요구를 집약할 수 있도록 노동조합 각급 단위 대의기구와 대변제도를 정비하는 게 급선무다.

직선제는 두 번째 문제인 노사정위원회 참가, 즉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민주노총의 전략과 연결돼 있다. 1998년 초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직선제 공약이 나오게 된 배경도 김대중 정부 초기에 이뤄진 노사정위원회 합의가 자리 잡고 있다. 역사적으로 직선제 실시와 사회적 대화 거부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사회적 대화(social dialogue)란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에서 공통의 이해가 걸린 문제와 관련해 노사정 대표자 사이에 이뤄지는 모든 형태의 정보교환·협의·교섭을 뜻한다. 사회적 대화가 노동자의 생활조건과 노동조건, 사회정의를 가장 잘 증진하는 제도라는 게 ILO의 입장이다.

기업 수준이나 산업 수준에서 이뤄지는 단체교섭도 당연히 사회적 대화의 범주에 들어간다. 노사협의회를 통해 이뤄지는 초보적인 수준의 노동자 경영참가도 사회적 대화라 할 수 있다. 최근 제기되는 제조업 약화와 철도 민영화, 조선산업 구조조정 역시 사회적 대화로 풀어야 할 문제다. 사실 노사관계 혹은 노사정관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활동이 사회적 대화인 셈이다.

관계는 힘을 전제로 한다. 힘이 없으면 관계에서 밀리고, 힘이 있으면 관계를 주도할 수 있다. 그리고 힘이 없다고 관계를 거부하거나 회피한다면, 힘겨루기의 경기장은 상대방이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재벌 일족에게 천국이 되고, 노동자 민중에게 ‘헬조선’이 된 이유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높고 노동운동에 우호적인 정당이 강력한 유럽에서만 사회적 대화가 가능하다는 법률만능주의 혹은 제도만능주의적 주장은 실천적으로 의미가 없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고 노동운동에 우호적인 정당이 없기에 더더욱 사회적 대화를 통한 돌파가 실천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2005년 사회적 대화가 민주노총의 공식 전략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컸으나, 정파들이 조장한 폭력사태로 좌절됐다. 이후 민주노총은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자의 전국 중앙조직이 놀 마당을 제 발로 차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선수가 경기장에 출전하길 거부한 셈이다. 그런데 2005년 폭력사태를 꾸미고 주도하고 방기하고 조장했던 사람들이 한마디 반성이나 자기평가 없이 민주노총이 낡았다며 혁신을 부르짖거나 정권교체가 급선무라며 보수정당의 품에 안기는 작금의 현실을 보자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세상에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전략이란 중장기적으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일을 구분하는 것이고, 전술이란 단기적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판단하는 것이다.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지만, 직선제는 전략상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 전술상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반대로 사회적 대화는 전략적으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전술적으로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격변하는 2017년 정세에서 직선제와 사회적 대화 두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면 98년 이후 지금까지 지속돼 온 난맥은 다음 지도부 임기(2018~2020년)까지 이어지면서 민주노총 운동 자체의 몰락을 초래할 것이다. 촛불 항쟁의 거대한 파도를 타고 넘을 노동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논의를 하루빨리 시작해야 한다. 그 논의의 중심은 직선제 문제와 사회적 대화 전략이 차지해야 한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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