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그나마 인간이 살 수 있을 만한 곳이 되도록 한 데에는 노동조합의 역할이 컸다. 앞으로도 노동조합이든 무엇이든 자본의 고삐 풀린 힘과 시장의 전횡을 사회의 이름으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한 미래는 기대하기 힘들 수 있다.

자본의 논리만 극대화되다 보면 결국 소수의 사람들만 오아시스를 누리고 다수는 사막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노동조합이 ‘사회의 사막화’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사회 전반으로 넓혀야 한다.

노동조합이 우리 사회의 희망이자, 일하는 사람들 모두를 이끌며 이 사회가 정의와 민주주의를 향해 가도록 하는 기관차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러한가? 우리 모두 되물어야 한다.

우리 사회 비정규직들, 기간제 직원들, 하청과 협렵업체, 소사업장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노조 가입은 현실적으로 제약이 크다. 분명 제도적인 제약이 있어서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노조 리더들은 하나같이 붉은색이나 푸른색 조끼를 즐겨 입게 됐다. 그것은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단결과 결연성을 상징적으로 표출하는 수단이다. 고용보장과 승진보장이 안 되는 기간제, 비정규직들에게 그 조끼의 의미는 무엇일까. 노조 조끼를 입는 순간, 그들은 미래의 고용기회를 포기해야 하는 무거운 부담에 억눌려 있지는 않나. 지금 주류 노조원들은 그들을 지켜 내기 위해 끈끈한 연대정신을 발휘할 의지와 역량을 갖추고 있을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 조끼를 입고, 머리띠를 두르고, 삭발을 하며 집단적 의사표출을 행할 수 있을 정도에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무언가 작은 권력이라도 누리고 있는 셈이다. 1970년대 말 유신 말기에 YH 여공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사측의 부당성에 맞서 싸울 때의 그 풋풋한 노조원들과 지금의 노조원들은 사회적 계층성에 있어 동일하지 않다.

말하자면 지금의 노조원들은 더 이상 이 사회의 최약자가 아니다. 계속해서 사막화돼 가는 우리 사회에서 노조원들은 그나마 작은 오아시스 곁에서 움막이라도 짓고 물이라도 마시는 상황으로 보여진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그들이 얼마나 최약자들의 희망이 되고 있느냐에 있다.

노동조합은 이 사회의 작은 권력이다. 사회적으로 권력의 출현은 자연스럽다. 누구든 세상을 좋은 쪽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권력이라고 하는 옷을 입어야 한다. 권력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선용하면 좋은 것은 것이 되지만, 악용하면 나쁜 것이 된다. 노조권력의 사회적 정당성은 노동조합이 그러한 권력을 무엇을 위해 쓰느냐에 있다.

크고 넓은 오아이스에 저택을 짓고, 사막 위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과 그들의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말라 가는 사회의 바닥에서 목이 타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우물을 파는 일이 급선무다. 지금의 노조가 누리는 작은 권력, 작은 오아시스를 전체 사회의 사막화 방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미래에는 이마저도 빼앗길까 두렵다.

지금 노조원들이 입고 있는 조끼는 그 의도와 무관하게, 어쩌면 그들이 우리 사회의 또 다른 권력자임을 표출하는 일종의 완장처럼 비치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 조끼가 만에 하나 기회와 권리를 못 가진 이들의 희망과는 동떨어진 ‘새로운 구별짓기’에 불과하다면, 그래도 그 조끼를 계속 입을 것인가? 현실의 작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과정에서 조끼 같은 과거의 상징물이 행여라도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벗어 버리겠는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