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자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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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철도청(코레일)의 ‘취업사기’였다. “1년 계약 후에는 전부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철도청의 말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철도청은 직접고용 약속을 깨고 KTX 승무업무를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2004년 초 입사한 1기 승무원부터 2005년 가을 입사한 4기까지 350여명의 승무원들이 “직접고용 약속을 지키라”며 2006년 3월1일 거리로 나왔다.

지난 10일 KTX 해고승무원 투쟁이 4천일을 맞았다. 이날 오후 서울 용산구 철도회관에서 ‘KTX 해고승무원 투쟁 4천일, 대안 모색을 위한 대화마당’이 열렸다. 해고승무원 가운데 17명이 참석했다. <매일노동뉴스>가 그들의 이야기를 지면으로 전한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입사했는데

강아무개(38)씨는 25살에 1기 승무원으로 입사했다. 철도청에 다니던 친척 어르신의 권유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지원했다. KTX 승무원은 곧 철도공사 소속이 될 테니 안정적인 직장이 될 것이라는 말에 솔깃했다. KTX 개통 당시 ‘선로 위의 스튜어디스’라는 언론보도에도 동원됐다. 강씨는 “승무원으로 일하는 게 정말 좋고 재밌었다”며 “현재 다른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다시 승무원으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남은 해고승무원 33명 가운데 27명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다. 16명은 가정주부다. 7명은 비정규직, 7명은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3명은 자영업을 한다. 지금은 각자 삶을 살고 있지만 복직의 끈은 놓지 않았다.

정아무개(38)씨는 3년간의 치열한 투쟁 이후 귀가했을 때 한동안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정씨는 “오로지 투쟁을 통한 복직만을 생각했는데 법적 판단을 기다리게 돼 뭘 해야 할지 몰라 방황했다”며 “그래도 나이가 젊은 편이라 뭐라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씨는 7년째 기업체에서 강연 관련 일을 하고 있다. KTX를 자주 타는데, 그때마다 '다시 승무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지금에 와서 뾰족한 수는 없는 거잖아요. 10년 넘게 안 해 본 거 없이 다 해 봤는데…. 그래도 오늘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모여 논의하는 자리니까 묘수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평범한 20대로 살아 볼 기회 잃어

2006년 3월 파업을 시작으로 쇠사슬을 몸에 묶고 점거·삭발·단식에 고공농성까지 안 해 본 것 없이 투쟁했다. 그러는 동안 함께 싸우던 동료는 10분의 1로 줄어 34명이 남았다.

2010년과 2011년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등법원은 코레일의 위장도급을 인정하고 코레일이 KTX 승무원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2015년 2월 대법원은 1·2심 결과를 뒤집고 승무업무 위탁을 합법도급으로 판결하고 파기환송했다.

대법원 판결 직후 동료 한 명이 세상을 등졌다. 이제 33명이 남았다. 코레일로부터 4년간 생계비로 받은 8천640만원이 '부당이득금'으로 둔갑했다. 상환할 때까지 연 15%의 이자를 붙여 갚으라는 지급명령이 청구됐다.

김영선(36)씨는 대법원 판결 이후 코레일이 8천640만원을 청구할 거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막상 지급명령서를 받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했다. "상환하지 않으면 강제 집행할 수 있다"는 문구가 무겁게 다가왔다.

“가장 좋은 나이, 삶의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도 있는 나이였는데…. 평범한 20대를 살아 볼 기회를 잃은 거죠. 지금은 언제 터질 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거예요. 얼마 전에는 월급이 차압될까 두려워 아예 회사를 그만둔 친구도 있어요.”

치열했던 투쟁의 기억은 한동안 숨겨야 했던 일이었다. 김씨는 “면접 자리에서 불합리한 일을 겪으면 투쟁할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며 “지금은 다 말하고 다니지만 전에는 될 수 있으면 굳이 꺼내지 않는 얘기였다”고 토로했다.

김승하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장은 “올해 초부터는 지연이자 15%가 붙어 한 달 이자만 108만원”이라며 “다음달이면 갚아야 할 돈이 1인당 1억원이 넘는다”고 설명했다.

“빚 있는 여자라고 미리 밝혀야 하나”

최근 결혼한 김아무개씨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남편한테 아직 말하지 못했다”며 “사기 결혼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갚을 돈도 없지만 억울해서 있어도 못 갚는 돈”이라며 “그 돈을 갚아 버리면 우리의 투쟁이 정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같아 앞으로도 절대 갚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로 ‘어린이 동지’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장혜진(37)씨도 30대 중반이 됐다. 장씨는 “얼마 전 마음을 흔든 남성분이 있었는데 코레일의 지급명령 기사가 나오고부터 연락이 끊겼다”며 “앞으로 소개팅을 할 때 빚 있는 여자라고 미리 밝혀야 하는지 고민이 든다”고 말했다.

장씨는 페이스북 페이지 ‘KTX 해고승무원’ 관리자다. 그는 “페이지에 게시한 글에 좋아요나 공유하기가 많으면 굉장히 기분이 좋아지고, 사람들의 관심이 떨어진 것 같으면 우울해진다”며 “SNS 활동에도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지금까지 투쟁한 단 하나의 이유 '복직'

“처음 투쟁을 시작해 지금까지 온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코레일 직접고용 복직이에요.”

딱 6개월 승무원으로 일하다 11년째 투쟁하는 배귀염(34)씨의 말이다. 배씨는 2005년 가을 4기로 입사한 막내 해고승무원이다. 그는 “중간에 자회사로 입사할 수 있는 통로도 있었는데, 가지 않은 이유는 함께 투쟁한 동료들과 함께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정당성을 인정받고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토론회 참석자들은 △코레일의 부당이득금 청구소송을 철회시킬 방법 △해고승무원 여론화 방법 △다음 스토리 펀딩 기획 △시민사회·노동단체와 연대투쟁 방법 등 15가지 주제를 놓고 원탁토론을 했다. 지부는 토론 결과를 공개하고 제안된 내용을 실행해 나갈 계획이다.
 

 해고승무원을 가장 아프게 한 댓글은?

“떼써서 정규직 되려고 한다”


해고승무원들이 “떼써서 정규직 거저 되려고 한다”는 댓글에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KTX열차승무지부(지부장 김승하)가 조합원 33명의 설문 결과를 지난 10일 공개했다.

4천일 동안 싸우면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1·2심 판결 승소”였다.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는 예상대로 “대법원 판결 패소”를 꼽았다. 투쟁을 통해 얻은 것은 “사회에 대한 시각”과 “동료”라는 답변이 많았지만 “빚”이라는 답변도 나왔다.

투쟁으로 잃은 것은 “시간·젊음·20대”였다. 자존감 및 정신적 피해와 친구가 뒤를 이었다. 지금까지 KTX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로는 “승리를 통해 옳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해고승무원들은 승무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철도노조의 도움”을 1위로 선정했다. 한 해고승무원은 “4천일이 지났는데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힘들다”며 “결국 피해자는 노조도 철도도 아닌 남아 있는 승무원들이라는 게 가장 힘들다”고 답했다.

김승하 지부장은 “KTX 승무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철도노조와 노동·시민·사회단체 등 연대의 힘이 필요하다”며 “끝까지 함께 목소리를 내어 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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