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지난 6일자 경향신문 1면 <‘게임산업 노동자’ 잔혹사> 기사는 좋았다. 탄핵과 대선을 놓고 극우와 보수 사이 원내 4개 정당이 펼치는 지저분한 헤게모니 싸움판에서도 고난받는 이들의 삶에 주목한 것 자체가 좋았다. 언론이 ‘구로디지털밸리의 화려한 변신’이라고 포장해 온 구로금천 공단지대는 아파트형 공장이란 겉치장과 달리 최저임금과 근로기준법·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무법지대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언론은 칙칙한 매연을 내뿜던 구로공단이 말끔한 아파트형 공장에 첨단 게임산업의 메카로 탈바꿈해 지하철역 이름도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바뀌었다고 홍보해 왔다. 그러나 게임산업 노동자들의 현실은 참혹하다.

21세기 수도 서울에 반세기 전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에나 있을 법한 노동법 무법천지가 펼쳐지고 있는데도 우리 언론은 역대 최장기 진보시장의 집권을 홍보하며 서울시장 치켜세우기에 바쁘다.

노동건강연대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같은 작은 노동단체의 실태조사를 파격적으로 1면 머리에 배치하고, 3면 전면을 털어 해설한 점도 좋았다. ‘소득상위 10%가 전체 소득 48.5%를 차지해 소득불평등 정도가 역대 최대’라는 같은날 한국일보 1면 기사도 열악한 워킹푸어 취약노동자들의 심각한 삶을 웅변한다.

일하는데도 점점 더 가난해지는 워킹푸어 문제를 해결하려면 싸구려 일자리 대신 질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려는 공공과 민간의 공동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선거 때만 되면 썩은 정치인들의 공약(空約)을 받아쓰는 언론들 때문에 “81만개를 만들겠다” “100만개를 만들겠다”며 정치인들은 늘 숫자 경쟁에 열을 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유승민의 ‘칼퇴근’ 공약은 적어도 일자리 숫자놀음보다 의미 있다. 심지어 정의당 심상정 대표의 ‘300만원 월급’보다 한 수 위다. 질 좋은 일자리가 단순히 월급 많고 적음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니 정당 지지율이 4%인데 후보 지지율이 0.5%에 불과하지 않겠나.

안희정 지사가 말하는 ‘근로자에겐 일자리, 약자에겐 안전망’이란 구호는 이미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실패로 끝난 ‘생산적 복지’의 동어반복일 뿐이다. 독일 사민당과 녹색당 연정이 추구했던 하르츠 개혁의 처참한 실패를 잊었는가. 이런 정책은 곧 신자유주의 구조를 공고히 할 뿐이다. 역시 조선일보는 안희정 지사의 발언을 기다렸다는 듯이 8일자 6면에 <‘현금 복지’와 다른 길 걷는 안희정>이란 제목으로 칭찬하고 나섰다. 극우신문이 지난 10년 동안 반복해 온 ‘보편적복지=현금복지=퍼주기복지’ 논리의 연장선이다.

안 지사의 정책은 한발만 더 나아가면 조선일보 8일자 30면에 실린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실장의 칼럼 <국민 속이는 말장난 일자리 대책>과 궤를 같이 한다. 변 전 실장은 “대선 후보마다 ‘일자리 대통령’을 내걸지만 일자리 나눔이나 공공 일자리 확충은 새로운 경제활동이 아니기에 하책(下策)에 불과하고 방법은 오직 하나 선진국 수준으로 규제를 과감히 풀고 사회안전망을 갖추면 우리 경제의 재도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는 북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2008년부터 시작된 미국발 경제위기에도 끄떡없는 이유가 전체의 40%에 가까운 일자리를 공공부문이 떠받치고 있기 때문임을 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인구 대비 공무원 숫자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치로 묶어 놓고 관치경제만 휘둘렀던 모피아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하는 진풍경에도 제대로 지적하는 언론이 없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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