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며칠 전 이른 아침 조조할인으로 관람했던 영화에서 “빌어먹을 민영화”와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라는 외침이 강렬했다. 정부의 어이없는 정책과 제도에 대해 과감하게 분노의 화살을 쏜 영화. 곳곳에 스며 있는 따뜻한 인간애와 기본권 쟁취를 향한 실천이 주는 감동. 80세 거장 켄 로치 감독의 열정이 빚어낸 무게감과 빛나는 연기로 대변되는 자본시대의 노동자 민중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는 평생을 성실하게 목수로 살아온 노동자다.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해 의사 권유로 일을 쉬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고용연금부에서는 ‘노동 가능 상태’로 본다. 질병수당과 실업급여 신청은 기각된다. 상담을 위한 통화도 잘 되지 않는다. 마우스 한 번 잡아 보지 못한 그는 온갖 신청과 대기로 관료장벽을 대면하게 된다. 그의 분노는 장벽을 향한 직접행동과 제도적 이의제기로 이어진다.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는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한부모가족의 가장이다.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자신은 굶으면서 일자리를 찾아 헤맨다. 그녀에게 자존감은 사치에 불과하다. 굶주리다 못해 식료품지원센터에서 허겁지겁 통조림을 따먹다가 직원에게 들키자 오열한다. 생리대를 살 돈도 없고 가게에서 도둑질하다 들켜 눈물을 쏟는다. 신발 밑창이 떨어져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사랑하는 딸에게 운동화를 사 주기 위해 성매매까지 하게 된다.

가난은 너의 책임이라는 국가와 정부 앞에서 이들이 기댈 곳은 없다. 가난하고 병든 노동자 다니엘과 절박하고 옹색한 케이티는 서로를 돕는다. 실업 상태의 두 노동자가 감내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절벽이다. 목숨을 버리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든지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하는 것, 이 양자택일 외에 자존을 유지할 비책이 선뜻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들 가난한 자들의 연대에서 낯설지 않은 희망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매슬로(Maslow)는 인간 욕구의 중요도에 따라 생리적, 안전, 소속 및 애정, 자기존중, 자기실현 욕구 등 5단계 계층을 이루고 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첫 번째 욕구, 즉 생존권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이 이성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 신자유주의와 민영화로 인한 복지후퇴의 참상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세상이다. 1%의 절대부자들이 떵떵거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자본주의 체제.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을 제공하고 그나마 생존이 가능한 사람들을 제외한 절망계층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사회복지제도’ 아닌가. 고차원적인 목적 외에도.

로치 감독은 영국 사회복지정책의 뿌리인 ‘구빈법’에서부터 명성이 자자했던 복지정책의 그늘과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이 취약한 우리와 다를 바가 무엇일까.

로치 감독은 이 영화로 2016년 5월 69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2006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수상). 수상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가난은 너의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잔인함이 문제”라는 날 선 비판을 날렸다. 수상 후에는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는 가슴 뭉클한 수상소감을 남겼다. 정부 고위 당국자가 민중을 "개돼지"로 부르는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 새겨들을 말이다.

노동자 다니엘이 죽기 전 적어 뒀던 글은 결국 그의 장례식에서 케이티가 읽었다.

“나는 의뢰인도 사용자도 고객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동등한 입장에서 이웃을 도왔습니다. 자선에 기대지 않았습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오전 9시께 비용이 가장 싸서 ‘가난한 사람들의 장례식’으로 불리는 장례를 치르며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영화 속 다니엘 블레이크가 고통받았던 제도의 현실은 그의 이름이 여러 차례 거명되면서 실제로 고쳐졌다고 한다. 끝내 승리한 것이다.

노동자 민중을 개돼지로 아는 이 땅에서도 100일째 촛불에 1천만명을 훨씬 웃도는 사람들이 직접행동에 나섰다. 구조적 모순에 저항하는 한 명의 사람으로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한국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들에게도 박수를.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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