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연인원 1천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퇴임 당일까지 레임덕이 없을 거라던 철옹성 박근혜가 실제로 퇴진할 수밖에 없는 국면이 열렸다.

세상을 바꾼답시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허덕대며 뛰어다녀도,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던 사회운동가들의 몸과 마음에 웃음꽃이 피었다. 역사책에서나 봤던 대통령이 쫓겨나는 그런 역사를 살아생전 경험하다니. 들떠 있었다. 환희였다.

그랬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웃음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몸짓에선 활기가 떨어졌다. 답답해하는 느낌을 말투와 표정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많은 활동가가 고민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서로에게 질문도 했다.

박근혜가 쫓겨난다고 해서 세상이 정말로 바뀔 수 있을까.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면 세월호의 엄마·아빠들은 그만 울어도 되고, 노동자 간 소득격차가 10배까지 벌어진 문제가 해소되고, 재벌 일가 곳간이 열리며 극단의 양극화가 해소되고, 지진으로 떨고 있는 경주 일대 핵발전소 문제가 해결되고, 청년들 일자리도 해결될까.

똑같은 정치와 경제가 반복된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사회운동이 1천만 광장의 열기를 이어받아 ‘촛불 시즌2’를 열어야 하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탄식과 한숨이 섞여 나왔다.

그래서 일단 모여 보기로 했다. 2월17일 금요일이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봄을 준비하다”라는 제목으로 사회운동 활동가 포럼(참가신청 https://goo.gl/esRwVg)을 한다. ‘촛불과 한국사회’ 및 ‘촛불과 사회운동’을 주제로 고민을 나눌 예정이다. 촛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한국 사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조기대선 국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대선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석자 각각의 고민을 부담 없이 내놓아 보고 들어 보자는 취지다. 예정된 결론은 없다. 선지자가 나타나 정답을 딱 던져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몽상에 젖어 보기도 하지만, 불가능하리라. 운동 영역 구분 없이 전국에서 100~200명의 활동가가 모이지 않을까 싶다. 서울혁신파크 안에 있는 50+ 대강당에서 포럼을 한다. 불광역 인근에 붙어 있다.

포럼에 참석해 나는 무슨 화두를 던질까, 고민한다. 이미 주변에 호기롭게 던지긴 했다. "촛불에 운동은 없(었)다"라고.

촛불 초기에 나는 ‘죽 쒀서 개 주면 안 된다’는 고민을 했다. 그게 얼마나 웃긴 생각이었는지 돌이킨다. 죽은 누가 쒔는데? 지배집단 내부 권력투쟁으로 열린 판이었다. 조선일보가 죽 그릇을 준비하고 JTBC가 불을 피운 판이었다. 보수·진보 망라한 모든 언론이 대대적으로 불을 때운 판이었다. 촛불이 스스로 죽이 돼 200만으로 커지고 또 수만까지 줄어든 판이었다. 사회운동은 무기력했다. 퇴진행동을 만들어 광장 집회를 기획했으니까 사회운동도 죽을 쒔다, 고 말하기 쑥스러운 상황이다.

1987년 6월 항쟁은 사회운동이 만들고 주도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의 퇴진 촛불은 사회운동이 만들지 못했고 주도하지도 못했다. 판을 만들지는 못해도 만들어진 판을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운동사에 그런 사례가 많다. 현재의 한국 사회운동은 그렇지 못하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나는 처음부터 내가 몸담고 있는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에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민운동과 풀뿌리운동은 다를 줄 알았다. 촛불로부터 일정하게 신뢰받으면서 사회운동이 촛불을 주도하도록 일조할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도대체 왜? 사회운동은 이렇게 무기력할까?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영국 브렉시트와 프랑스 국민전선, 미국 트럼프 등의 극우파 현상, 그와 반대인 이탈리아 오성운동, 스페인 포데모스, 미국 샌더스 등의 신좌파 현상에는 공통점이 있다. 노동자 중에서도 주변부로 밀려난 밑바닥 노동자와 청년층이 진보건 보수건 기존 정치와 운동을 불신했다는 점이다. 기득권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그 현상이 한국에서도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한국 사회운동은 어떤 점 때문에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일까?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은 80년대 노선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혁명을 통한 권력 장악, 그것을 이루기 위한 총파업, 가투, 그것을 실행하는 전위 등으로 상징되는 노선이다. 한때 세상을 뒤집을 듯했다. 그러나 실패했고 실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앞에 무기력하다.

새로운 방식으로 출발한 것이 시민운동이었다. 참여·시민·환경·인권·평화·여성 등 다양하게 영역을 넓히며 전문적으로 운동했다. 각자 영역을 잘하면 된다고 했다. 한때는 각광받으며 세상을 변화시킬 것 같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와 퇴진 촛불 앞에서 무기력하다.

대안은 무얼까? 극복 방안은 무얼까?

사회포럼에 참가해서 고민을 듣고 나눌 생각이다. 노동운동과 민중운동과 시민운동과 풀뿌리운동 너 잘났다 나 잘났다 할 처지가 아니다. 모든 운동을 아우르는 집단 지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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