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40년의 독재시대를 살며 한평생 학문과 실천의 중심에 섰던 인물. 1980년대 해직을 당한 뒤 해직교수협의회 결성, 전노협과 민주노총 결성, 전교조와 전해투 창립 등 노동운동에도 큰 발자취를 남긴 실천적 지식인.

유기적 지식인을 지향했던 민교협의 창립과 한국 사회학 정립을 위한 학문과 실천의 삶을 살았던 민중의 스승 김진균.

김진균은 1937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57년 대학 생활을 시작해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브람스를 듣던 낭만적인 사회학도였다고 한다. 대학 4학년 때 4·19를 겪었고 68년 서울대 상과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카리스마, 엘리트와 근대화'라는 논문은 계엄당국에 의해 학술논문에서 삭제되기도 했다. 75년부터 서울대 사회대에서 강의와 연구를 병행했다. 그해는 4월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의 할복, 인혁당 관련 8명 사형, 긴급조치 9호로 이어지던 폭압적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본격적인 연구와 활동을 시작했다.

김진균은 "어느 날 연구실에서 테니스 라켓을 들고 나오는데, 학생들의 시위로 최루탄 냄새가 가득했다. 순간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라켓과 공을 다 치워 버렸다. 그 뒤로 테니스를 치지 않았다"고 훗날 고백했다. 이 시기에 다산학회에 참여하며 다산의 실학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동생 김세균 교수 등이 구속돼 뒷바라지하는 과정에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 등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80년 5월 광주 학살 이후 서울지역 교수 361명의 시국선언, 지식인 100인 선언에 동참했다. 곧바로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됐고, 80년 7월31일 서울대 교수에서 해직된다.

그는 이때를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그 값을 치러야 되는구나. 일종의 자존심이지. 그래 내가 그렇게 하지만 느그들한테 굴복하지 않겠다"며 결의를 다졌다고 술회했다.

김진균은 해고된 상태에서도 활동과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83년 상도동 허름한 건물에 자리한 ‘상도연구실’에서 민중사회학이 태동했다. 해고된 교수들과 산행모임 및 간담회를 거쳐 그해 12월 해직교수협의회를 결성하고 활동을 본격화했다. 84년에는 한국산업사회연구회(현 산업사회학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았다. 같은해 8월31일 서울대 사회대 교수로 복직했다.

강단으로 복귀한 이후에도 연구와 실천을 치열하게 병행해 87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와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를 창립했다. 여러 교수연구자단체의 대표와 회장을 도맡아 활동에 쉼이 없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폭발하자 노동운동을 직접 지원하기 시작했다. 전교조·전노협·전해투 등의 창립과 지원에 발벗고 나서 후원회 대표 역할을 맡아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그의 쉼 없는 실천활동은 90년대 중반 이후에도 끝이 없었다. 민주노총 지도위원과 진보네트워크·사회진보연대·민중연대 등의 대표를 맡아 노동자 민중운동의 현장과 호흡을 같이했다.

필자는 2002년 발전파업 때 명동성당 농성장에서 만났던 김진균 교수를 잊지 못한다. 운동진영에 유명했던 김진균·김세균 형제교수를 같은 자리에서 뵙기는 처음이었다. 전력 민영화 반대파업의 의의와 감격에 대해 말씀하시며 따뜻하게 격려해 줬다. 당시 명동성당에 동행했던 여러 교수님들과의 인연도 그의 덕택이었다. 현재 민교협 상임의장인 송주명 교수와는 그때 명동성당에 지지방문하려다 경찰에 저지되던 장면이 한겨레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나왔다는 후일담을 지금도 유쾌하게 나눈다.

역정과 노고로 가득한 삶은 김진균 교수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2000년 대장암 수술을 받았지만 2004년 2월14일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났다. 정년퇴임 1년 만이었다. 김진균은 사회학자로서 연암 박지원이 꿈꿨던 상자이생(相資以生)의 사회와 동양적 이상사회인 대동사회(大同社會)를 그의 몫만큼 학문과 실천의 영역에서 진전을 이뤘고 나머지는 꿈으로 남겼다. 그의 유지를 잇기 위해 김진균기념사업회가 활동 중이다. 기념사업회는 김진균상을 제정해 진보적 학문과 운동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인식과 실천이 결합된 학문 추구의 과제를 후학들에게 남긴 김진균. 민중이 서로 돕고 사는 이상사회인 ‘상자이생, 대동사회’를 꿈꿨던 김진균. 해마다 봄을 기다리는 이맘때면 민중 속으로 몸을 던졌던 불나비 김진균 선생과 미완의 꿈이 떠오른다.

2017년 2월, 한파로 인해 아직 봄내음은 멀었고 역사의 봄도 아득한 듯하다. 하지만 사흘 후면 입춘이다. 어느덧 지척에 와 있는 봄. 척박한 역사의 땅에 춘래불사춘이라지만 그의 별칭이었던 ‘너른마당’에는 역사의 봄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 제 몸을 태워 어둠을 몰아내는 촛불이 1천만을 넘긴 상황에서 시대의 봄맞이를 학수고대한다.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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