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오랫동안 현장에서 비정규직을 조직하는 활동가가 의견을 보냈다. ‘뭣이 중헌디’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지금은 적패 해소와 사회대개혁을 위한 촛불 2막에 온 힘을! 운동과 주체를 새롭게 재구성해야 할 때”라 했다. 날것의 외침이 ‘훅’하고 심장으로 돌진하는 느낌이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익명을 조건으로 소개해도 되나 물었다. 머뭇대던 그이는 거듭되는 청에 승낙했다. 내용은 둘이다. 하나는 진보정치, 나 같은 이들을 향한 질타였다. 나는 민주노동당 분당의 한 축이었다. 아팠고, 당면 방침에선 차이가 있지만 비판을 수용하며 소통해야 진일보할 수 있겠다 판단했다. 하나는 우리 안의 적폐, 전적으로 동의한다. 1월22일은 노동해방 정신의 전노협 창립 27주년이었다. 지금부턴 그이의 글이다.

두려웠다. 진보정당이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될까. 그럴 리도 없지만 저분들이 권력을 손에 쥐면 어떻게 될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목소리 크고 세가 있으면 ‘장땡’, 자기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혈투를 벌이는 모습들.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 이해와 설득, 소통과 공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민주주의조차 실현 못해 부정선거 시비가 벌어지곤 했다. 공식 의사결정 기구는 정파 입장에 따라 좌지우지되곤 했다. 요샛말로 비선실세 그룹이 있는 것이었다. 정파에 줄 서지 않으면 활동하기 어렵다는 하소연도 들렸다. 지도부와 입장이 다르면 반조직자, 명령불복종으로 몰리기도 했다. 혼자서는 버티기 어려워 용인·묵인·순응하기도 하고 때론 조력하기도 했다. 믿을 구석을 찾아 다른 집단과 관계를 맺기도 했다. 노조 권력이든 정당 권력이든 잡으려고 혈안이 된 모습. 다수파 패권이니 소수파 분파주의니 진흙탕 싸움 속에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분열했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는 실패했다. 그들에게 당원·조합원·민중은 어떤 존재였을까? 돈 대 주고 몸 대 주는 존재로 대상화하지 않았는지. 정파 중심, 상층 중심의 의회정치에 동원되는 대상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난 두렵다. 지금의 진보세력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진다면 어찌될지.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이 실패한 이유가 있다. 그것을 진단·성찰하고 변화를 위한 노력과 실천이 선행되고 조합원과 시민들의 공감을 얻지 않는다면 정치 일정에 따른 정치세력화 시도는 또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묻는다. 우린 그간의 운동을 제대로 성찰하고 반성하고 있는가? 아직도 남 탓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실패했으면 혹독한 반성과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저들에게는 책임을 요구하면서 왜 우리에게는 관대해지는 걸까? 새로운 모습이 없다. 그간의 행태에 대한 변화된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추진되는 진보정치운동이 제대로 설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이다. 민중경선과 단일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분들의 생각도 존중해야 한다. 다만 모두가 모든 걸 거는 방식으로 추진돼서는 안 될 것이다. 이해와 설득으로 공감과 동의를 얻는 방식이 아니라, 결정했으니 지침이라며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몸 대 주고 돈 대 주기를 강요하면 안 될 것이다.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민주노총에서 무리하게 억지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동의되는 분들이 힘을 모아 진행하면 된다. 그게 민주노총에 도움은 주지 못할 망정 어려움을 주지 않는 것이고 훨씬 더 주체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운동을 모색하는 것일 것이다.

더 중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촛불은 지배 카르텔과 부역자들의 부조리한 행태가 드러나면서 폭발적으로 진행됐다. 불공정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공정사회에 대한 요구가 동인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위기하에 사회경제적 억압과 박탈이, 이에 대한 변화의 요구가 기저에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의 다수가 이야기한다. “사람만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적폐를 해소하고 사회대개혁을 해야 한다. 광장의 촛불을 일터와 삶의 공간으로까지 확장해서 우리 안의 적폐를 없애고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같은 생각이다. 정치개혁·사회개혁·재벌개혁·노동개혁을 진전시키기 위해 온 힘을 모아야 한다. 최저임금 1만원, 노동조합을 할 수 있는 권리, 법 지키기, 노동시간단축(칼퇴근을 허하라)을 구호가 아니라 실행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힘을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이다. 촛불이 대선으로 제도권으로 흡수돼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타오르게 해야 한다. 다중의 다양한 방식의 운동을 확산시켜야 한다. 정치권이 탄핵에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했을 때 촛불시민이 이를 강제해 냈듯이 적폐 해소와 사회대개혁을 힘으로 강제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또 묻는다. 우리 모습은 어떤가? 우리 안에 적폐는 없는가? 노조 할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정작 가입하겠다는 노동자를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면서도 묵인·방조·용인하지는 않았는지, 차별 해소를 이야기했지만 결국 차별과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거울 속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면까지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안의 적폐를 들여다봐야 한다. 주체가 병들어 있는데 아무리 좋은 설계를 한들 되겠는가. 지금이 기회다. 지난 20년 가까이 변화와 혁신을 외쳤지만 크게 변한 것 없는 우리를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 안의 적폐를 그대로 드러내자. 힘들고 아프겠지만 드러내고 바꿔야 한다. 만만치 않을 것이다. 경계를 허물고 공론의 장에서 만나고 토론·소통하고 공감을 형성하자. 그 속에서 변화의 동인과 동력을 만들어 보자. 그래야 주체와 운동을 재구성, 확대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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