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호 한국노총 조직본부 교육국장

아직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너이기에 아무래도 '걱정'은 내 몫인 것 같구나. 취학통지서를 받아들고 한참을 쳐다봤다. '이 아이가 잘 할 수 있을까. 또래 아이보다 키도 작고 먹는 것보다 먹지 않는 것이 훨씬 많은 이 아이가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단다. 아마도, 많은 부모들이 그리고 그 부모의 부모들도 이런 걱정을 했을 거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걱정은 너로 인한 것이 아니더구나. 근심의 원인은 네가 나아가고 있는 세상에 있었어. 키야 자라면 되고(작아도 상관없단다) 먹는 것이야 차차 나아지겠지만, 네가 살아갈 세상은 내 어린 시절에 비해서도 자라지도 나아지지도 않는 것 같구나.

사상 최악의 실업난으로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정 할 일이 없으면 자원봉사자로 세계를 다녀 보라"며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하라"고 이야기하는 세상물정 모르는 노인이 요즘 뉴스의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어. 이 노인의 말을 풀이하자면 아빠가 해야 할 일과 책임을 미룬 채 아이에게 '고생도 경험'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더군다나 이 할아버지가 우리나라의 최고 권력자를 꿈꾸고 있다니 나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네가 앞으로 교과서에서 배울 ‘법은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말도 현실과는 큰 차이가 있단다. 수백억원(‘억’을 아직 잘 모르겠지만 ‘백’보다 훨씬 큰 숫자야)의 뇌물을 제공해서 그 몇백 배의 이익을 내면서 경영권을 세습한 자는 감옥에 가지 않고 있어. 너도 잘 알고 있듯이 잘못을 하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의 법은 그 사람의 위치와 지위에 따라 판단을 하고 있다는 얘기야. 보수언론은 그 자가 처벌이 되면 나라 경제가 큰일 날 것처럼 떠들고, 법원은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삼성 장학생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단다. 그래서 나는 두렵기도 해. 너의 작은 입에서 '무전무죄, 유전무죄'라는 단어가 여전히 되뇌어질지 모르는 미래가.

그렇지만 이 모든 것보다 우리를 더 슬프고 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네 옷에 달려 있는 노란 리본, 바로 세월호란다.

네가 광장에서 배운 ‘박근혜 퇴진’을 할아버지 앞에서 외치자, 할아버지가 물었지. “너 그게 뭔지 알아?” 하고. 너는 크게 대답했어. “알아요! 물속에 빠진 언니, 오빠를 구하지 않았잖아요.” 맞아, 천일이 넘게 지나도록 그날의 진실과 아픔은 여전히 바닷속에 잠겨 있고 언니 오빠들의 엄마 아빠는 아직도 슬픔 속에 살고 있어. 우리가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고, 잘못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다면 세상은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 뿐 자라나지도 나아지지도 못할 거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보니 앞서 한 이야기를 취소해야 할 듯싶다.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은 네가 아닌 어른들이었어.

적어도 너는 착하고 정직한 게 무엇인지를 알고 있잖아. 그리고 흥얼거리는 노래를 통해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음을,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으니 너는 다른 많은 어른들보다 훨씬 나은 어린이임에 틀림이 없다.

아빤 네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조금 더 정의롭기를 바란단다. 이번 주말에도 우리 함께 광장에서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촛불을 들자. 지금 아빠가 살고 있고, 앞으로 네가 살아가야 할 미래를 위해서.

세상을 향한 너의 또 다른 한걸음을 축하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한국노총 조직본부 교육국장 (labo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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