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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촛불항쟁과 노동의 시작 ②] 감시와 통제로 쌓아 올린 판옵티콘 '노동개악'박은정 민주노총 정책국장
   
▲ 박은정 민주노총 정책국장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우리 사회 정경유착의 밑바닥을 여실히 보여 줬다. 대통령을 비롯한 국정농단 세력, 재벌 총수는 뇌물죄로 특별검사 수사를 받고 있다. 개혁이라는 그럴 법한 이름을 달았던 파견 확대나 성과연봉제 같은 노동의제도 실상은 그 범주 안에서 움직였을 개연성이 크다. 활활 타오른 촛불 덕에 헌법재판소는 탄핵소추안 심리를 시작했다. 거꾸로 선 나라를 제대로 세우자는 논의가 한창이다. 노동자들이 새로운 나라의 모습을 고민해 <매일노동뉴스>에 보내 왔다. 일곱 차례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판옵티콘(Panopticon)은 높이 솟은 원형감시탑 위에 앉은 간수가 빙 둘러쳐진 수인의 방을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원형감옥이다. 이 구조의 또 다른 특징은 수인들은 어두운 감시탑을 들여다볼 수 없지만, 감시자들은 환한 불빛이 비치는 수인들의 방을 잘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18세기 영국의 법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통제자들이 어둠의 뒤에서 감시하고 통제하는 사회를 원형감옥에 투사했다.

박근혜와 최순실 그리고 그들의 부역자들은 어둠 속에서 온 국가를 감시하고 통제했다. 통제는 정권 초기부터 각 정부부처와 공적 영역에 걸친 인사전횡으로 이어졌고, 인사전횡은 다시 강력한 통제수단이 돼 간수를 절대권력으로 만들었다. 더불어 간수의 속내와 판옵티콘의 구조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했던 재벌대기업은 틈날 때마다 간수를 매수하고 자신들도 잇속을 챙겼다. 심지어 재벌대기업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산업현장 곳곳에도 판옵티콘을 건설하고자 했다.

박근혜표 노동개악이 노동현장의 판옵티콘이며, 그 원리는 바로 ‘성과주의’ 감시체제였다. 고용노동부는 노동자 이익에 반하는 취업규칙 완화지침으로 ‘성과주의’라는 감시와 통제체계를 사용자 마음대로 만들도록 했고, 쉬운 해고 지침으로 성과평가에 따른 처벌을 허용했다. 노동관계법이 규정한 노사 대등 노동조건 결정 원칙, 이 최소한의 평등조차 노동부는 부정했다. 거대한 촛불민심이 궐기한 지금, 노동부는 올해 또다시 불법 양대 지침을 확대 적용하고 노동개악 입법을 마무리하겠다는 계획까지 발표했다. 노동개악이 지난 4년의 성과라고 자화자찬도 했다.

이렇듯 노동부는 감시와 통제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한다. 노동부가 자화자찬한 4년 동안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들은 어처구니없는 계약변경과 계약해지를 겪어야 했다. 수많은 사례들이 노동위원회 판정례에서 드러난다. 정년을 두 해 남긴 노동자는 어느 날 갑자기 촉탁계약직이 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직을 대신 서 달라는 부탁을 거절한 것은 협력심이 부족해서라며 저평가를 받고, 이어 권고사직을 종용받다가 최하위 평가를 받아 해고되는 노동자들이 생겨났다.

걸레질한 자리에 물기가 남았다고, 정시 퇴근을 한다고, 동료의 부탁에 인상을 찌푸린다고, 갖가지 이유로 낮은 평가등급을 받아 부서에서 밀려나거나 퇴직을 권고받은 노동자들이 늘어 갔다. 업무능력을 평가하는 상사에게 현찰을 건넸다가 발각이 돼서 오히려 징계 해고를 당하는 노동자가 있는가 하면, 전적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저성과자 교육을 해서 번거로운 해고를 대행해 주는 신종 노무관리업체들이 생겨났다.

박근혜표 노동개악이 만든 ‘성과주의’ 판옵티콘이 사업장 곳곳에 번져 가며 감시와 통제의 위세를 더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항도 만만치 않다. 노동자들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맞서 왔다. 공공기관 성과퇴출제에 맞선 공공·금융노조의 총파업이 최대·최장 기록을 남겼고, 해를 넘긴 지금도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무엇보다 박근혜와 비선실세, 그리고 부역자들이 쌓아 올린 판옵티콘은 환하게 밝혀진 광장의 촛불에 의해 부정한 실체가 드러났고 포위됐다. 간수에게만 허락된 수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역으로 주권자의 권력에 의해 감시받고 통제되고 있다. 그에 따라 국회는 박근혜를 탄핵했다.

국민에 의해 감시받을 자들이 국민을 감시하고 부당하게 통제하는 지배의 판옵티콘이 무너지고 권력의 평등이 실현될 수 있을까. 1천만 촛불이 밝힌 평등의 광장은 박근혜와 부역자 등 통치자들을 감시하는 시놉티콘(Synopticon·대중이 소수 권력자를 감시할 수 있다는 것으로 판옵티콘의 반대 개념)이 될 수 있을까.

이런 희망을 깔아뭉개듯 2017년 노동부 정책 방향은 노동자를 위한 정책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광장의 힘을 자각한 노동자와 민중은 다시 통제의 원형감옥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 사회 도처에서 일깨워진 정의와 주권의식은 광장의 촛불을 저마다의 가슴 깊이, 일상의 공간으로까지 이어 가자고 촉구하고 있다. 주권은 청와대의 향방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 권력행위는 불가피하게 평등에 반하는 것도 아니다. 시놉티콘의 광장은 노동현장의 시놉티콘으로 진화해야 한다. 사업장의 감시와 통제는 인간의 자존감과 주체성을 뿌리부터 잠식한다. 내가 일터의 촛불을 그리는 이유다.

박은정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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