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12월 계약 1년만에 해고된 서울대 성악과 시간강사 전유진(45)씨가 오는 3월 다시 강단으로 돌아간다.한국비정규교수노조 제공

서울대 음대 성악과 시간강사 6명이 3월 강단으로 돌아간다. 학교측과 시간강사들은 지난해 12월 중앙노동위원회의 화해안을 받아들였다.

서울대 음대는 시간강사에게 관행적으로 5년의 임용기간을 보장했다. 2014년에도 5년 고용조건을 내걸고 시간강사를 뽑았다. 소프라노 전유진(45·사진)씨는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칠 수 있게 돼 기뻤다. 수업이 끝나도 학생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수업 관련 질문부터 인생 상담까지 전씨는 말 그대로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서울대는 2015년 12월 관행적으로 5년을 보장했던 시간강사를 1년 단위로 임용하기로 제도를 바꾸더니 음대 시간강사 113명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고등교육법 시행에 대비한다는 이유를 댔다. 당시 2011년 개정된 고등교육법을 놓고 정부와 여야, 이해 당사자들이 첨예하게 맞섰다. 고등교육법 개정으로 주 9시간 이상 강의하는 전업 대학 강사에게 교원 지위를 부여하고 1년 단위로 계약하도록 했는데, 전임교수 대신 전임강사를 채용하고 시간강사를 퇴출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노동계가 반발하자 지난해 1월까지 법 시행이 세 차례나 유예됐다.

전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투쟁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그는 1년여의 복직투쟁을 “끝도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걸어가는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한평생 음악만 했던 그가 마이크를 잡고, 천막농성을 하고, 거리에 섰다.

“한국(대학)에는 발을 못 들일 수 있다”는 교수의 말에 “그럼 이민 가죠”라고 맞받아쳤다는 전씨는 1년 넘게 투쟁을 이어 갔다. 그리고 결국 다시 강단에 선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6일 서울 아현동 전씨의 집에서 그를 만났다. 전씨는 올해 3월부터 해고 전에 가르쳤던 ‘영어 딕션(발음)’ 수업을 맡는다.

“금수저가 아닌 금도금의 삶”


- 복직을 축하드린다. 5일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기자회견 때 “3월에 복직합니다”며 발랄하게 말하던 모습이 신선했다.

“현장에서 투쟁하며 배운 말이 있다. ‘지치지 말고 웃으면서 즐겁게 투쟁하라.’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세월호 참사를 보며 손가락질했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돈 많이 받으면서 왜 데모를 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죽했으면 추운데 길거리에 나왔을까’ 싶다. 사회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는데 그걸 몰랐다. 나는 내가 금수저인 줄 알고 살았다. 한데 금도금이었다. 사람은 그 입장이 돼 보기 전에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거 같다. 내가 그랬다.”


- 음악만 하다 복직투쟁에 나서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땠나.

“2015년 12월29일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천막을 쳐 본 적이 없다. 얼기설기 치고는 겨울밤을 나는데 지지대가 없으니 천막이 날아갈 것 같았다. 영하 17도 겨울밤을 여자 선생님 2명이 천막 양쪽을 잡고 보냈다. 그렇게 어설펐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후배 선생님과 이후 선생님이 될 학생들에게 부당함이 돌아간다는 거다. 모두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했다. 질 때 지더라도 저항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끝도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걸어가는 심정이었다.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들의 내성을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봐 처음에는 엄청 저항하더니 힘들다고 나자빠졌어. 해 봤자야’라는 내성을 만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 2014년 12월께 113명의 시간강사가 계약해지됐다. 6명만 부당해고 구제신청에 들어간 이유가 있나.

“성악과가 40여명으로 가장 많았다. 다른 과는 계약 3~4년차에 해고됐다. 성악과는 계약 1년차였다. 반발이 가장 셀 수밖에 없었다. 복직투쟁을 시작하며 내분을 막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 40여명의 생각이 같다고 여겼다. 그런데 각자 주머니에 든 돈의 액수가 다르더라. ‘함께하자’고 독려했지만 6명만이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한 분들도 있다.”


- 다 함께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을 것 같다.

“서울시립합창단으로 간 선생님께서 굉장히 미안해하셨다. 내 생각은 다르다. 능력 있는 선생님이 서울대 밖에서 인정받는 것을 보며 학교가 얼마나 부당했는지 증명했다고 본다. ‘함께 복직하지 못해 아쉽다’고 하자, 선생님께서 ‘괜찮다’며 오히려 우리를 다독여 주셨다. 다른 선생님들은 복직 소식을 듣고 우셨다. 이런 게 동지애인 것 같다.”

“가장 앞에 나온 순간, 유턴도 좌회전도 없었다”

- 내분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는데, 어떤 점이 힘드셨나.

“이런 말을 들었다. ‘아무도 믿지 마라. 아군이라고 믿는 사람이 적군일 수 있고, 적군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의외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투쟁에서 얻은 진리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사람은 변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얼떨결에 대오 맨 앞에 서는 바람에 힘들었다. 내 이름이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지고, 얼굴도 언론에 나왔다. 사실 너무 무서웠다. 강사 생활을 계속해야 하고, 기회가 되면 교수도 해야 하는데…. 앞에 나서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가장 앞에 나와 있었다. 이미 앞에 나왔는데, 쪽팔리게 뒤로 돌아설 순 없지 않나. 운명이라 생각하고 직진했다. 유턴도 좌회전도 없었다. 오로지 직진이었다.”


- 쉬운 결단이 아니었을 것 같다. 음악계는 속칭 바닥이 좁아 이후 활동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교수님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국에 발 못 들일 수 있다. 그래도 괜찮겠냐?’ 호기롭게 ‘이민 가죠’라고 답했다. 사실 겁이 났다. 그러나 어쩌겠나. 처음 보는 선배님이 ‘수고가 많다’고 물어만 오셔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를 알아보는 것에 겁이 났다. 호의로 말씀해 주신다는 걸 알고 나서야 마음이 따뜻해졌다. 우리가 싸우는 동안 서울대 내부에 있는 학생·청소노동자·기계전기노동자·대학노조 등 너무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셨다.”


- 학교는 고등교육법을 이유로 해고했다. 사태가 종결됐다고 보긴 힘들지 않나.

“학교는 그렇게 핑계를 대고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고등교육법, 일명 시간강사법 때문이 아니다. 음대 학장에게는 성악과가 눈엣가시였다. 2014년 학장은 학부제 시행을 추진했다. 교수회의에서 다수결로 결정하려 했고, 성악과 선생님들은 투표를 아예 거부했다. 서울대 성악과 동문회를 조직해 반대운동을 했다. 결국 학장은 학부제 시행을 중단했다. 그에 대한 보복조치라고 생각한다. 2014년 계약해지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은 성악과다. 다른 과는 시간강사가 많아 봤자 10여명이다. 성악과는 40여명이다.”


- 재판까지 가지 않고 중앙노동위원회 화해안을 받아들였다.

“화해할 생각은 없었다. ‘강사 따위야 교수 맘대로 자를 수도 있지’라고 말한 사람이 총장이다. 중앙노동위에서 적극적으로 화해를 유도했다. 우리는 3년 고용보장을 요구했고. 학교측은 2011년 개정된 고등교육법이 시행되지 않거나 유예되면 3년, 개정안이 시행되면 2년간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받아들였다. 우리 뒤에는 8만명의 시간강사가 있었다. 시간강사들이 계속 일자리를 잃는 상황에서 우리가 문제를 잘 푸는 것이 중요했다.”


- 교육부가 지난해 11월 말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비정규교수의 설자리가 더욱 좁아지고 있다.

“민중은 개돼지라고 했던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에서 만든 법이다. 두 번이나 유예된 법이다. 한국은 학생 대비 교수가 너무 적다. 전임교수를 뽑지 않는다. 4대 보험을 적용받지 못하는 비정규직만 뽑는다. 나라에서 칼을 뽑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1년짜리 비정규직만 양산하는 법이다.”


- 이제 학교로 돌아간다. 1년여 만에 교단으로 돌아가는 소회를 밝힌다면.

“무엇보다 모교인 서울대로 돌아가는 것이 기쁘다. 학창 시절 ‘모교에서 강의하면 좋겠다’던 꿈을 이뤘다.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싶다. 학생들과 교감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열심이 쫓아다닐 생각이다. 우리 문제가 해결됐다고 다른 사람들을 모른 척하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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