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이문열은 그래도 줄줄이 딸린 어린 자식과 아내를 남겨 놓고 사상에 미쳐 저 혼자 살겠다고 월북한 아버지를 향한 분노라도 있었다. 그래서 이문열이 색깔론에 찌들어 흰소리를 할 때마다 밑바닥엔 낡은 냉전 논리가 할퀴고 간 가족사의 아픔이 생각나 측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인화(류철균)는 뭐란 말인가. 85학번, 386의 중간 세대인 그에겐 '빨갱이' 아버지도, 빨갱이 자식이라고 놀리는 동네 사람들도 없었다. 국립대 교수인 아버지 밑에서 따사롭게 자랐는데.

물론 교수 아버지는 이광수와 최남선 같은 친일 작가 작품과 그들의 친일행적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며 친일 작가들을 은근슬쩍 편들었지만, 그 시절 우리는 고리타분한 아버지에게 대들듯 군사정권과 기성세대가 만들어 낸 정치체제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는가. 그 옛날 나라 팔아먹은 아버지를 죽이고자 식민지 청년들이 조직했던 살부계(殺父契)처럼.

이인화의 출세작 <영원한 제국>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모두 표절 시비가 일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에 편승한 그의 글은 충분히 달콤했다.

그러다 <인간의 길> 서문을 읽고선 소름이 끼쳤다. “내가 죽어 신이 이승에서 무엇을 했느냐 물어본다면 <인간의 길>을 썼다고 대답할 것”이라는 대목에선 파시즘의 향수가 짙게 묻어났다. 박정희 찬양이란 새로운 정치소설의 영역을 개척한 <인간의 길>은 이전 그의 책만큼 속도를 내 읽을 수가 없었다. 곳곳에 자리 잡은 군더더기와 구어체와 문어체의 이종변주에다, 현학적인 사유로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인간의 길>은 지독한 가난을 뚫고 일제강점기를 버텨 낸 소년 박정희의 생존기에 가깝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박정희가 무조건 옳다고 봐요. 민주화 탄압도, 유신도 옳았다고 말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이인화는 일찍이 박정희를 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자신의 논문 <한국근대소설사연구>에 가져다 쓴 김윤식 교수를 고발했던 이명원 평론가는 스승을 배신한 대가로 대학원을 떠나야 했다. 이명원은 학교를 떠나면서 “내 모교에는 희망이 없다는 판단이 든다. 정당한 문제를 제기해도 이미 나는 왕따다”라고 했다.

논문 주제부터 지도교수가 정한 범위 안에서 허락받아야 하는 우리 학풍에서 김민수 교수는 서울대 미대를 설립한 장발 박사의 친일행적을 비판했다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뒤 오랫동안 풍찬노숙의 천막강의를 이어 가야 했다.

반면 이인화는 1989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쓴 ‘문학비평의 근대성과 유토피아’를 통해 아닌 척하면서 스승 김윤식을 현란하게 치켜세웠다. 얼마 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 발표되자 김윤식과 이문열은 불후의 명작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20대에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가 된 이인화는 정유라가 받은 ‘스토리텔링’ 어쩌고저쩌고 하는 강의와 그 계통으로 쭉 연구를 거듭했다. <한국경제신문>은 2013년 7월19일자 17면에 '줄거리 창작 돕는 한국형 SW 나왔다' 기사에서 “엔씨소프트와 이화여대 디지털 스토리텔링 연구소가 국내 최초로 줄거리 창작을 돕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고 썼다. 콘텐츠 창작자가 자신의 구성에 따라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도움을 준단다. 당시 다른 신문은 프로그램 개발자를 이인화 교수라고 보도했다. 이렇게 이인화는 창작마저 기계가 대신하는 시대를 열었다.

평생 문학평론을 했던 김열규 교수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해마다 한 권 이상의 책을 냈다. 김 교수는 91년 나이 육십에 하던 일을 접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같은 삶을 살고자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읽고 쓰고 사색하기를 반복했다. 여든의 노학자는 2013년 신작 <읽기 쓰기 그리고 살기>(한울)에서 “디지털 시대의 읽기와 쓰기가 보편화된 요즘 손으로 읽고 쓰기는 무척 성가시고 복잡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읽기의 으뜸은 책이고, 쓰기는 손이 최고”라고 했다. 같은 학자라도 어찌 이리 다른지.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