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민족국가를 기본 단위로 세계 질서가 형성됨과 동시에 인류는 또 다른 한편에서 국제적인 자원과 인력의 활발한 이동을 경험했다. 세계인·글로벌 시민이라는 이상이 확대되면서도 모든 나라들은 철저히 자국의 이해를 위해 냉혹하게 움직이고 있기도 하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식 경제국수주의가 대중적인 호응을 받는 상황은 우리가 아직도 서로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에 얼마나 익숙하지 못한지 실감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필드(global field)는 이미 실체화된 무대다. 오늘날 세계의 주요 산업계를 주무르는 다국적 기업들은 하청기업들에게 상당한 수준으로 ‘질서 있는 경영’을 강조하며, 이른바 ‘사회적 감사(social audit)’의 엄격한 통과의례를 거칠 것을 요구한다. 자사 브랜드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그들은 하청기업들에게 국적을 불문하고 철저하게 도덕과 규범을 체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이 강조하는 가치의 내용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노동이다. 노동기본권 준수와 근로조건의 적절한 제공은 이제 글로벌 하청기업들이 원청에 납품을 할 수 있는 필수조건이 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대자본이 소자본에게 노동조합이 행할 요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글로벌 시장공동체의 높아진 인권의식이 국제공급망(global supply chain)에 자연스럽게 각인된 결과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희생과 노력이 있었음도 자명하다.

이런 식으로 글로벌 경제무대는 새로운 규범(norm) 공동체로 탈바꿈해 가고 있는 듯하다. 자본의 전략이자 '면피용' 장식물로 폄하될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글로벌 하청기업들은 그에 대해 적절하게 순응(compliance)하는 방법을 전략적으로 강구하면서 기업 경영의 새로운 중심 요소로 삼아야 하는 상황인지라 그 심각성은 현실화되고 있어 보인다. 그들은 안으로는 노조를, 밖으로는 글로벌 원청을 응대하는 식으로 이중의 압력에 처하게 됐다. 더 이상 개발도상국에 이른바 ‘인건비 따먹기’ 식의 얄팍한 전략만 달랑 가지고 나가서는 큰코다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국내 인건비 압력을 못 이겨 동남아시아로 나간 한국 중견기업들과 중소기업들은 이러한 글로벌 경제환경 변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핵심적인 주체들이다. 그들이 새로운 환경이 요구하는 규범을 내면화하면서 지속가능한 기업활동을 전개하는 일은 당장 기업 스스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며, 그와 동시에 국익에도 부합한다. 나아가 그것은 개도국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궁극에는 글로벌 경제의 인간적 질서 구현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하기에 따라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해외투자기업들은 이렇게 변화하는 환경에 얼마나 제대로 된 적응적 선택(adaptive choice)을 하고 있을까. 그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쉽게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들이 그러한 변화에 온전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미 한국에서부터 그리고 최고경영자 스스로 그러한 규범의 의미를 이해하고 내면화하는 것이 필요하겠으나 그러한 조건을 갖춘 기업들이 다수라고 보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나가서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대응을 매우 도구적이고 표피적으로만 행하다 보니, 계속해서 변화하는 환경을 리드하고 유연하게 적응하는 능력을 체화하는 수준에는 못 이를 가능성이 크다.

이런 문제에 대해 국내 기업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노동조합과 소비자, 그리고 정부 모두 일정하게 관심을 갖고 적절한 투자와 지원, 나아가 채찍질까지 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안에서부터 새지 않는 바가지여야 밖에 나가서도 새지 않게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려면 국내에서 경영활동, 투자·생산활동을 하는 기업들을 규범하는 수위가 높아져야 한다. 그들에 대한 사회적 계몽의 공적 인프라도 갖출 필요가 있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한국 안에서부터 노동을 존중하는 기업관행이 한 차원 높게 정착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종의 '윈윈 시추에이션(win-win situation)'의 조성을 조심스럽게 꿈꿔 볼 법하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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