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우리나라 대표적 지식인 집단인 대학교수들의 전문지인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입니다. "백성은 물, 임금은 배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랍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국민의 탄핵 요구를 잘 표현한 것 같아 “역시 교수님들이야”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이 밖에 "천리를 거스르는 자는 패망하기 마련"이라는 뜻의 역천자망(逆天者亡)이나, "작은 이슬방울들이 모여 창대한 바다를 이루듯, 과거의 낡은 시대를 폐기하고 성숙한 공화정인 2017 모델로 나아가는 한국 역사의 큰 길을 시민들의 촛불바다가 장엄하게 밝혔다"는 뜻의 인중승천(人衆勝天)도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다니, 현 정세를 잘 대변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문구가 추천이 됐다는데 노이무공(勞而無功)이 없어 좀 아쉬웠습니다. 노이무공은 "수고롭기만 하고 공이 없음"이란 말로, 온갖 애를 썼으나 보람이 없을 때 쓰는 말이지요. 우리 속담 "죽 쒀서 개 준다"와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번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죽 쒀서 개 준다"라는 표현을 가장 먼저 쓴 사람은 국민의당 원내대표 박지원씨입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탄핵소추안 의결을 앞두고 만약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 박근혜 대통령은 직무정지에 들어가고, 대통령의 권한은 현 총리인 황교안으로 돌아가는데 그건 자칫하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돼 염려스럽다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압도적으로 가결되고 박근혜는 안방(관저)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어부지리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황교안이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기관장 임명 인사권을 행사하는 등 진짜 대통령 행세를 하게 된 것이지요. 수백만이 광장과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들고 싸워 어렵게 박근혜를 쫓아냈는데, 박근혜가 임명한 박근혜 수족이 권한대행이 됐으니 수많은 군중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돼 버린 것이지요. 이런 일이 벌어지자 촛불시민들 사이에서는 걱정하는 소리가 울려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죽 쒀서 개 주는 게 아니야” 하는 염려였지요.

촛불시민들이 이런 염려를 하는 것은 쓰라린 역사적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1960년 4월 혁명은 학생들이 주축이 돼 부정부패의 반민주 정권을 몰아낸 민주·민생 혁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혁명 주체세력의 비정치적 성격과 정치적 대리인으로 나섰던 당시 야당의 무능으로 결국 1년 만에 군부독재세력인 박정희에게 되치기 당해 버린 것이지요. 죽 쒀서 개 준 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피로 이룬 4월 혁명이 역사상 반쪽짜리 혁명이 돼 버린 것이지요. 그렇게 애써 끓인 죽을 빼앗아 먹은 군부독재세력은 개발독재를 앞세워 국민에게 철권을 휘둘렀습니다. 드디어는 10월 유신을 통해 영구집권 독재체제를 획책하며 저항하는 민중을 총칼로 탄압하기에 이르렀지요. 이에 저항해 대통령 직선을 통한 민주주의 회복을 부르짖으며 들고일어난 것이 87년 6월 혁명이었지요. 사무직 노동자들과 학생·시민 등이 주축이 돼 시작된 항거는 제조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며 들고일어남으로, 결국 전두환 정권은 항복선언을 하기에 이르게 되지요. 그러나 그렇게 싸워 헌법까지 고쳐 쟁취한 선거에서 혁명세력을 대변한다는 야당의 분열로 결국 대통령을 유신독재세력인 노태우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또 한 번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됐지요. 결국 87년 6월 혁명도 반쪽짜리 미완이 되고 말았습니다.

좋은 죽은 밥보다 영양가가 높고 맛도 좋습니다. 그만큼 끓이는 데 노력과 정성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모양은 꼭 개밥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개들이 자기 밥인 줄 알고 덤벼드는 거죠.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인 것 같습니다. 우리 민중과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애써 끓여 놓은 맛있는 영양죽을, 날로 먹으려는 세력들이 침을 흘리고 있습니다. 여야 정치세력들이 그들입니다. 호시탐탐 죽그릇을 노리는 개들에게 우리의 죽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우리가 더욱 눈을 부릅뜨고 지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몽둥이도 필요하겠지요. 우리가 더 열심히 촛불을 들고 거리로 광장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31일은 올해의 마지막날입니다. 우리가 켜 드는 촛불이 횃불이 돼 활활 타올라야 우리가 원하는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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