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2016년 한 해가 간다. 올 한 해의 마지막날은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수십만명의 사람들과 함께 보내려고 한다. 날은 춥고 주말을 광장에서 보내느라 몸도 피곤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기에 즐겁다. 광장은 많은 사람들의 ‘말’로 넘쳐난다. 평등한 집회를 위해서도 이야기하고 정권의 공작정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의료민영화와 철도공공성에 대한 이야기도 들린다. 그야말로 ‘광장’이다. 이렇게 광장이 열린 것은 그동안 고통을 당하면서도 박근혜 정부에 맞서 싸웠던 이들이 먼저 광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강남역에서, 미대사관 뒤에서, 동화면세점에서, 일본대사관 앞에서, 광화문광장에서, 서울대병원 앞에서 작은 광장들이 열렸고 그 광장에서 우리 사회가 왜 바뀌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왔다. 그 힘으로 오늘날의 큰 광장이 열렸다.

우리는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분노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이들을 광장에 나오게 한 힘은 그 ‘분노’만은 아니었으리라. 헬조선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미래 없는 삶, 정치를 생각할 여지조차 없게 만드는 장시간 노동, 불안정한 삶 때문에 당당하지 못했던 내 자존감의 상처에 이르기까지 그만큼 힘들었던 날들이 지금 광장의 힘이다. 박근혜 탄핵 이후 광장의 집회는 축제가 되고 있지만, 가슴 한편에 응어리지고 날이 서 있는 이 고통의 날들에 대한 변화의 희망은 아직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경남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24세 전기공은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최저임금을 받고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결혼은 꿈꿀 수 없는 지금의 내 삶이, 박근혜가 퇴진한다고 해서 달라질까요”라고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렇다. 아직 사회는 바뀌지 않았다.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삶도 그대로고, 취업이 될까 걱정하는 내 삶의 불안정성도 그대로다. 박근혜와 최순실이 재벌들과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놓고, 비정규직을 늘리는 비정규직 관련법 개악안을 내놓고, 저성과자 해고제도를 내놓고, 의료민영화를 시도하고, 우리들의 연금으로 삼성 이재용의 경영승계를 지원한 사실이 밝혀졌다. 최순실은 감옥에 있지만 재벌들은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노동개악은 계속 시도되고,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죽음은 지속되며, 현대자동차 용역들은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죽음을 부르는 손배·가압류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거제와 울산의 조선소에서 수만명이 해고되고,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다치거나 죽는다.

일터 민주주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만 일터에서도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박근혜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 유산인 재벌 중심 사회, 사람 생명이 기업의 이윤보다 낮게 여겨지는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 이상 우리 삶의 변화는 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벌들은 박근혜 정부가 합리적이지 않고 부정의했기 때문에 쉽게 결탁했고, 그것 때문에 노동자들의 삶은 불안정해졌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재벌들은 사법부와 경찰과 언론을 등에 업고 노동자 권리를 탄압했다. 재벌과 기업의 권력을 통제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박근혜 정치'는 다시 등장한다. 박근혜 정치를 막기 위해서라도 일터 민주주의가 절실하다.

1987년 민주화 투쟁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말하고 행동할 공간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치 공간이 열린 후 시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려 할 때 노동자들의 요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됐다. 2016년 촛불은 정치적 주체인 ‘시민’으로서 자신을 명명했던 많은 이들이 노동자 정체성을 깨닫고, 사회와 일터 모두에서 권리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발전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정치의 주인으로서 박근혜에게 퇴진을 명령하고 박근혜 정치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듯이, 노동자로서 우리 노동과 일터의 주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려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조직’의 이름으로 말해야 한다. 개별 ‘시민’이 ‘노조 조합원’이 될 때 일터에서 주체가 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촛불의 광장이 더 확산되고 일터에서의 민주주의로 전환될까 두려워하는 기득권 세력들은 벌써부터 노동자와 시민을 갈라놓으려고 한다. ‘박근혜 퇴진’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한 것이라고 훈수를 둔다. 그러나 우리가 박근혜 퇴진만을 이야기하는 순간 박근혜 없는 박근혜 정치가 지속된다. 박근혜를 만들어 왔던 우리 사회 재벌권력에 대한 통제를 준비해야 하고,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이윤 중심의 가치를 바꿔야 하고, 땀 흘려 일하는 사람, 자신의 노동을 소중히 여기는 모든 사람들이 주인이 되고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진짜 박근혜 정치를 없애는 길이다. 우리의 촛불은 그렇게 진화해야 한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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