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진미 영화평론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의 좌파감독 켄 로치의 영화로, 201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여든이 넘은 켄 로치 감독은 50년간 60여편의 TV작품과 영화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전해 왔다.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켄 로치의 정신은 이번 영화에도 잘 담겨 있다. 영화는 선별복지의 문제를 정면으로 고발한다. 제목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주인공이 항의 표시로 벽에다 쓴 문구에서 딴 것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자신의 말을 시작하는 주인공의 당당함은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드러낸다.

1. 선별복지의 아이러니

영화가 시작되면 노인의 몸 상태에 대한 기계적 질문과 퉁명스럽게 답하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모든 사달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목수로 일하던 중 심장발작을 일으킨 다니엘은 의사의 권고에 따라 일을 그만두고, 질병수당을 받기 위한 심사를 받는 중이었다. 그러나 수급대상에서 탈락한다. 사지의 기능이 멀쩡해 노동이 가능하니, 질병수당은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복잡한 사무 절차를 밟아 재심을 청구하지만 언제 재심이 열릴 지 알 수 없다. 그동안 실업수당이라도 받아야 하는데 그마저 쉽지 않다.

사회복지와 관련한 모든 서류의 신청과 제출은 인터넷을 통해 하도록 돼 있다. 평생 목수로 일해 온 다니엘은 컴맹이다. 그뿐이 아니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면 이력서 쓰는 법도 교육받아야 하고, 계속 구직활동을 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다니엘은 직접 작업장을 방문하며 일자리를 묻지만, 그것으로는 증빙자료가 되지 못한다. 막상 구직이 돼도 일을 할 수 없다. 의사가 일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일할 마음도 없으면서 구직활동을 하고 다녔냐는 질타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다니엘은 질병으로 노동을 할 수 없지만, 서류상으로는 노동능력이 있다고 간주된다. 그 결과 질병수당과 실업수당 중 어떤 복지혜택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로 내몰린다.

딱한 것은 다니엘만이 아니다. 다니엘은 사회복지 사무소에서 자신처럼 억울한 처지에 놓인 싱글맘을 발견한다. 두 아이를 키우는 케이트는 셋집에서 쫓겨나 런던의 노숙자 숙소 단칸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 낯선 뉴캐슬 지방으로 이사 왔다. 길눈이 어두워 예약시간에 늦었지만 불성실에 대한 제재를 가하겠단다. 런던보다는 주거사정이 나은 지방에 와서 방송통신대를 다니며 새롭게 일을 시작해 볼 요량이지만, 당장 전기료를 낼 돈도 없다. 무료 식품배급소에서 식료품과 휴지를 받아든 케이트는 생리대는 없는지 묻는다. 허기를 참을 수 없어 허겁지겁 통조림을 따먹다가 수치스러움에 몸을 떨고, 마트에서 여성용품을 훔치다 적발돼 자존감이 무너진다.

영화는 선별복지의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막대한 행정절차와 비용을 들여 선별복지를 하고 있지만 다니엘을 위한 복지에 그가 컴맹이라는 사정은 고려되지 않으며, 케이트를 위한 복지에 그가 여성이라는 사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일생 정직한 노동으로 살아온 다니엘이 노동은 하지 않고 복지혜택만 받으려는 게으름뱅이로 오인되고,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 보려 발버둥치는 케이트는 성매매 유혹에 쉽게 빠진다. 가난은 곧 부도덕으로 매도된다. 모든 것이 일자리는 적고 복지 문턱은 높은 탓이지만 사회는 이들에게 남들보다 더 노력해 이기라는 말을 들려줄 뿐이다. 공무원들은 관료적 절차를 강조하고, 걸핏하면 경찰을 부르겠다며 윽박지른다. 이것은 인성 문제가 아니라 구조 문제다. 수급자에게 친절한 직원은 오히려 징계를 받는다.

영화는 사회복지 시스템의 실상을 고발하는 한편,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비춘다. 다니엘은 케이트의 집을 고쳐 주고, 옆집 이주민 청년은 다니엘에게 인터넷 서류 제출을 도와준다. 케이트는 자신의 한 끼 식사를 최소한의 성의라며 다니엘에게 내놓는다. 자존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며 사회복지 사무소 담벼락에 글씨를 쓰기 시작하는 다니엘. 그에게 연대의 박수를 보내며, 경찰에게 격렬하게 항의하는 행인이 있다. 케이트가 사회복지 사무소에서 수모를 당할 때 다니엘이 편들어 줬던 것처럼, 다니엘의 저항을 응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큰 힘이 된다.

2. 보편적 복지의 길

영국은 1905년에 실업노동자법을 제정하고, 1911년에 국민보험법을 만들 정도로 사회보장정책이 일찍 발달한 나라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사회보장 프로젝트를 수립해 현대 복지국가의 모델이 됐다. 그러나 1979년 보수당의 대처가 집권하면서 복지는 크게 후퇴한다. 감세와 민영화로 양극화가 심해졌다. 보편복지는 약화되고, 선별복지가 강화됐다. 이후 18년 만에 노동당이 집권하지만 신자유주의 기조는 철회되지 않았다. 과거 복지국가 모델은 폐기됐고, 소위 ‘제3의 길’이라는 개념이 부상했다. ‘일하는 복지’를 표방하며, 국가가 실업수당을 제공하기보다 새로운 일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재교육해 자조와 자립을 돕는다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제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니엘이 겪는 곤경이다.

다니엘의 곤경은 낯설지 않다. ‘송파 세 모녀’ 역시 노동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돼 선별복지 기준에 누락됐다. 그 결과 복지 사각지대에서 죽어 갔다. 이러한 선별복지의 폐해를 막기 위해 보편복지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지금껏 한국 사회에서는 선별복지가 상식인 양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2010년 무상급식 논란을 거치면서 보편복지 개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보편복지가 필요한 이유를 꼽자면 이렇다.

첫째,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광풍으로 중산층도 생활상 위기를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 불안정성이 높아졌다. 둘째, 빈곤층을 가려내는 과정에서 과도한 행정비용이나 낙인 효과가 발생한다. 셋째, 선별복지에서는 사회 구성원이 복지혜택을 ‘받는 자’와 ‘주는 자’로 나뉜다. ‘주는 자’는 복지에 소극적이 돼 재원마련이 점점 어려워지고, 대상자 선별을 강화하라는 요구가 커져서 실제로 복지가 필요할 때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넷째, 보편복지는 인간의 삶이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예방할 수 있어서, 오히려 비용측면에서 효과적이다.

생활비가 바닥나자 다니엘은 세간을 내다 판다. 그 와중에도 목공예 작품과 목공 연장은 팔지 않던 다니엘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난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하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포기와 수치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마지막 말이 쟁쟁한 여운으로 남는다. 촛불의 광장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요구가 분출하는 지금, 시혜가 아닌 시민권으로서의 복지를 외쳐야 할 때다.

영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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