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정봉과 만옥의 뜨거운 포옹을 그려 낸 ‘반줄(banjul)’은 386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 집은 아직도 종각역 보신각 뒤 골목길에 그대로다.

1980년대 종로의 랜드마크는 ‘반줄’이 아니다. 당연히 ‘종로서적’이다. 큰길가에 있어 찾기도 더 쉬웠다. 종로서적은 80년대 청춘들 만남의 장소였다. 종로서적 입구 게시판은 만남을 이어 주는 접선메모로 가득했다. 휴대전화도, 삐삐도 없던 시절 종로서적 게시판은 아날로그지만 좋은 휴대전화였다.

종로서적에는 전노협 모범 단체협약을 뛰어넘는 훌륭한 단협을 가진 노조가 있었다. 80년대 출판노련의 핵심이었던 종로서적노조는 2000년 산별노조로 출범한 언론노조에 들어가 활동했다.

종로서적은 1907년 ‘예수교서회’라는 기독교서점으로 시작해 2002년 6월 문을 닫기까지 무려 95년 동안 한자리를 지켰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긴 서점이었다. 나는 2010년 11월 바로 이 지면에서 종로서적이 문을 닫은 건 "한 시대의 문화가 사라진 것"이라고 했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종로서적 부활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추억의 종로서적이 23일부터 다시 종로에 문을 열었다. 장소는 아쉽게도 옛 종로서적에서 길 건너 반디앤루니스 종로점 자리다. 새 종로서적은 영풍문고 전무를 지낸 서분도 대표가 운영한다. 따라서 옛 종로서적 창립자 가족과 무관하다.

영풍문고는 한강대교 아치 위로 올라가 회사의 대규모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싸웠던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의 한이 서린 곳이다. 영풍문고와 시그네틱스 둘 다 영풍그룹 소속이었으니. 특히 영풍문고는 시그네틱스·코리아써키트·테라닉스·고려아연·서린상사 등을 연결하는 순환출자 고리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시그네틱스 해고 노동자들은 자주 보신각 대각선 맞은편 영풍문고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새로 생긴 종로서적은 지하 2층이라 옛 종로서적처럼 큰길에서 바로 보이지도 않는다. 때문에 ‘종로거리의 상징성 복원’이란 꿈을 이룰지는 미지수다. 무엇보다도 80년대 종로서적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청년들이 사라졌다. <경향신문>은 22일 오늘의 청년을 ‘88만원 세대’에서 더 낮춰 ‘77만원 세대’라고 불렀다. 경향신문은 22일자 1면 '저임금 청년들, 이젠 77만원 세대'라는 기사에 이어 21면에는 '소득 줄고, 부채는 늘고 더 팍팍해진 청년 가구'라는 해설기사까지 덧붙였다.

옛 종로서적을 드나들며 시대를 고민했던 30년 전 청년들은 오늘의 청년들에게 알바 1분 늦었다고 시급도 떼어먹는다.(조선일보 22일자 14면 ‘알바 1분 늦었다고 못 받은 시급, 받아 낼 수 있다’) 이웃나라 일본의 아베 총리도 ‘동일노동 동일임금제’를 위해 비정규직 임금인상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나선 마당에 우리만 이러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 탄핵까지 이끌어 낸 힘은 중고생까지 나서 키워 낸 청년 촛불의 힘이었다. 지난 21일 연합뉴스 젊은 기자 97명이 성명을 냈다. 청년 기자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사를 데스크가 난도질해도, 국정교과서를 ‘단일교과서’라고 쓰라는 지시가 내려와도, 대다수 시민과 한 줌도 안 될 관변단체를 일대일로 다루는 기사가 나가도 우리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고 자성 목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의 반대편엔 종로서적 게시판에서 가두시위를 모의하던 386이 데스크로 앉아 있다. 쪽팔려서 못살겠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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