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총구로 시작한 박정희 군부독재가 궁정동의 총성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 아류들이 인민을 향해 총구를 난사하고 역사적 범죄 기간을 연장했던 1980년대. 암흑의 시대 너머 변혁을 꿈꾸던 ‘위장취업자’ ‘학출’ ‘학삐리’ 등으로 일컬어진 학생운동가들이 집단적으로 노동현장에 투신했던 80년대. 1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중 한 명이며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이라는 변혁의 시대사를 기록한 역사학자 유경순.

유경순은 81년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85년에 노동현장으로 투신해 인천 부평4공단 '마찌꼬바'를 거쳐 경도실업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해고를 당하고 복직투쟁을 진행했다. 87년에는 1천800명이 일하던 대공장 동국무역에 입사해 3개월 후 6월 항쟁을 겪었다. 이어진 7·8·9월 노동자대투쟁기에 공장노동자들의 자발적 투쟁이 진행됐고 이 주체들을 조직해 이듬해 민주노조 결성에 성공했다. 새롭게 건설된 민주노조의 사무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구속됐다. 당시 변혁을 꿈꾸며 싸웠던 수많은 활동가들처럼 분노를 켜켜이 속으로 삼키며 견뎌야 했던 시대의 익숙한 경로였다. 출소 이후 89년에 봉제업종노조 건설을 위한 지역단체 ‘봉제노동자의 집’을 결성했고, ‘봉제노동자회’ 대표로도 활동했다. 92년부터는 건강이 악화돼 치료에 전념했다.

98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사학과 현대사(노동운동사) 연구를 시작해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99년부터는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연구위원과 교육위원으로 2008년까지 연구와 교육에 집중했다. 같은해 시작한 역사학연구소 연구원과 2002년부터 맡은 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 활동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과 노동자교육센터 부대표로도 활동했다. 여러 대학에서 현재까지 강의를 하고 있다. 주로 노동운동사 연구와 교육을 했지만 현재는 여성노동자(운동) 문제 연구 및 교육활동으로 주제가 확장돼 있다.

유경순은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썼고 제4회 김진균 학술상을 받았다. 함께 쓴 책으로 <함께 보는 근현대사> <노동자, 자기역사를 말하다> <가스노조 20년, 과거에서 희망을 찾다> <현대자동차노조 20년사> <전노협 1990~1995> 등이 있다. 엮은 책으로는 구로동맹파업 주역들이 쓴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 :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 삶을 말하다> <나, 여성노동자>(전 2권) 등이 있다.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전 2권)은 1980년대를 통찰하고 연구한 결과를 2013년에 발표한 역작이다. 80년대 노동계급의 상태와 노동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다. 필자도 곁불 쬐듯이 경험했던 시대의 훌륭한 기록을 숙독하고 있고 기회가 되면 그의 열강도 듣는다.

유경순은 격동의 현대사 30여년 세월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노동운동사 연구와 교육으로 이어 왔다. 그가 연구에서 주목했던 80년대 대반전은 1987년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로 인해 분노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본격화됐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외침이 광장에 가득했던 6월 항쟁은 '속이구 선언'으로 불리는 6·29선언으로 인해 직선제 개헌과 대선경쟁으로 전환됐다. 하지만 7·8·9월 억압과 착취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노동자대투쟁의 폭발로 이어졌다. 독재의 끝물인 줄 알았던 1987년, 대선은 군부정권 연장이라는 결과를 남기고 말았다. 쿠데타 군바리들과 부역자들을 역사와 현실의 법정에 세우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지연됐다. 연장된 군부독재 타도의 목표를 남기며 80년대가 저물었던 것. 다만 민주노조를 향한 열망과 조직의 확산이 역사적 성과로 축적됐다.

제한적 법제도화로 우선 멈춤했던 87년 6월 항쟁은 현재의 촛불항쟁에 어떤 시사점을 줄 것인가. 노동자·민중의 여망이 총구 앞에 허망하게 사라졌던 80년의 잔인했던 봄. 군부정권의 백기투항이라며 만세를 불렀지만 부분적 법·제도화에 만족해야 했던 87년의 여름의 좌절. 30년 만에 다시 광장에서 역사적 실패의 도돌이표를 반복하지 말아야 할 2016년 분노의 가을. 일단 승기를 잡고 진행 중인 촛불항쟁은 이 겨울을 어찌 마무리할 것인가. 당대 권력자의 실각 또는 교체만으로 세상의 질적 변화나 낡은 체제의 혁파가 담보되는 것이 아님을 수차례 기록한 한국사와 한국노동운동사. 훗날 시대의 증인 역사학자 유경순은 오늘을 어떻게 기록하게 될까. 각성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근본적 변혁을 향한 로드맵으로 구성되고 실행되며 명예혁명의 봄으로 안착될 수 있을 것인가. 촛불항쟁의 노동자·민중은 역사적 물음 앞에 결과로 답해야 한다.

탄핵을 앞둔 날 광장을 향해 누군가 이솝우화를 인용했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ltus!). 에라스뮈스에 따르면 “이 격언은 자기 능력을 떠벌리기만 할 뿐 그 능력을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지 못하는 사람을 겨냥한 말”이라고 한다. 헤겔과 마르크스도 인용했다. 하지만 현대사 100년을 상고한 2016년 겨울 한국의 노동자·민중은 광장에서 이렇게 외친다. “낡은 체제를 혁파하기 위해 루비콘강은 건넜지만, 뛰어내려야 할 로도스는 아직 멀었다.”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