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

삼성 38, 현대 47, SK 53, LG 47, 롯데 48, 한화 52, 한진 45, CJ 53.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기업들의 설립연도다. 설립 이후 이름이 바뀐 기업이 많은데 어쨌든 뿌리는 깊다. 이 기업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민주항쟁의 현대사를 거쳐 자본을 축적하고 기술을 고도화시켰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사업 영역은 말도 안 되게 넓어졌고, 덩달아 매출도 크게 뛰었다. 그리고 2016년, 2세 혹은 3세 회장님들이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1차 청문회(6일) 생중계는 못 보고 나중에 편집된 영상과 사진을 몰아서 봤는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동공지진, 그 밑에 달린 "그렇게 면접 보면 탈락해요"라는 댓글. 김승연 한화 회장과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의 불편한 조우. 연로한 회장님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의 안절부절.

배를 잡고 웃다가 갑자기 씁쓸해졌다. “아, 저 사람들이 우리나라 경제권력의 최고봉이지!” 수만 개의 하청기업과 소속 직원들, 그리고 수백 만명의 노동자들이 회장님으로 모시는 사람들의 실체를 확인하니 자괴감이 들었다.

낡고 후진 경제권력이 부패한 정치권력에 빌붙어 위세를 부리고, 유능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을 괴롭혀 온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참담했다. 이 나라를 어디서부터 얼마나 바로잡아야 하는 건지 까마득한데, 갑자기 내가 아는 사람들의 풍경이 떠올랐다.

졸린 눈을 가까스로 비비며 탑승한 만원버스. 퇴근시간 직전에 내려오는 업무 지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는 CCTV. 욕설과 함께 머리로 날아오는 서류뭉치. 등 뒤로 전해 오는 서늘한 뒷담화. 회식자리 부장님의 불쾌하고 재미없는 야한 농담. 경기가 어렵다며 두 달째 돈이 안 들어오는 월급 통장.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해고문자. 취업 문턱을 넘기 위해 칸막이 책상을 차지한 누군가의 탄식.

폭력이 난무하는 잔인한 일상 속에서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신입사원에게 욕설을 내뱉은 과장은 전날 밤 술자리에서 부장에게 모욕을 당했을 것이다. 부장은 국장에게, 국장은 사장에게 모욕을 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장은 원청업체 대리에게 납품단가를 낮추라는 협박을 당했을 것이다. 각자 억울한 사연들을 풀어헤치고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얼마 전에 우리가 TV 생중계에서 지켜본 재벌기업 회장님들의 얼굴이 나온다. 이어 대통령이 등장한다.

12월9일 대한민국은 시민주권의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탄핵 가결이라는 환호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았다. 아침이 돼 눈을 떠 보니 불안함이 엄습했다. 박근혜는 아직 대통령이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완수되지 않았다. 갈 길이 먼데 여의도는 벌써부터 대선이다. 어제도 과장은 신입사원에게 욕을 퍼부었고 같은날 저녁 신입사원은 커피숍 직원에게 신용카드를 던지며 고함을 쳤다. 2016년 달력의 마지막장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대한민국’으로 기록되진 않을까 불안하다. 이 나라가 헬조선이기 때문에 근거 없는 불안함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불안함을 떨쳐 내는 유일한 방법은 불안함과 직면하는 것이다. 같은 불안함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손을 맞잡는 것이다. 지난 한 달여,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한 이들이 굉장히 많다. 평소에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동료직원이 알고 보면 지난 주말에 나와 같이 광장에 섰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잔인한 일상의 장면 곳곳에서 작은 광장들을 열어 가자. 각자 촛불에 담았던 변화의 열망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토론과 행동을 이어 가자. 끝까지 함께.



청년유니온 위원장 (cartney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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