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1960년 4월19일은 화요일이었다. 화요일엔 오전 9시에 경무대에서 국무회의를 했다. 4·19 시위대는 이날 정오 경무대 정문까지 육박했다. 경찰이 사력을 다해 저지했지만 시위는 진정되지 않았다. 오후 1시 경찰이 결국 실탄을 발포해 현장에서 100여명이 죽었다. 시위대에 의해 파출소가 불타고, 반공연맹이 불타고, 광화문에 있던 경찰 중앙무기고가 습격당했다. 무기고 습격은 비상계엄령 선포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무기고에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해 현장에서 8명이 죽었다.

비상계엄령을 재가받으러 온 김정렬 국방장관과 홍진기 내무장관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깜짝 놀라며 “아니 무슨 데모야?”라고 물었다. 국방장관이 3·15 부정선거를 보고하자 대통령은 “뭐, 부정선거? 아니 후보자가 나 혼자였는데 무슨 부정선거야?”라고 되물었다. 국방장관은 “부통령 선거에서 경찰이 잘못 생각해 선거부정을 저질렀습니다” 하고 말하자 대통령은 금시초문이란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은 이때까지 ‘부정선거’라는 말조차 못 들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코미디가 ‘심기경호’다. 3·15 선거부터 한 달 넘게 시위가 벌어졌지만, 국무위원과 경무대 누구도 대통령에게 단 한마디도 안 했다.

한 달 넘는 촛불에도 박근혜 정부 장관 누구도 사퇴하지 않았지만, 60년 4월21일 국무위원은 전원 사표를 냈다. 이날 국무회의는 이기붕 부통령 사퇴도 결론 내렸다. 국무위원들은 홍진기 내무장관과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이기붕 본인에게 직접 알리라고 했다. 두 장관 앞에서 이기붕은 선선히 사퇴를 표명했다. 국무위원들은 그해 4월23일 아침 이기붕 부통령 사퇴 발표와 시위 진정을 기다렸다. 그날 점심 무렵 신문 호외가 나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면씨의 부통령직 사퇴”라는 큰 활자 아래 “이기붕씨 부통령 당선 사퇴 고려”라고 작은 글씨가 박혔다. 오히려 야당인 장면 부통령이 사퇴한 마당에, 시위 원인을 제공한 집권 자유당의 이기붕 부통령은 모호한 표현으로 빠져나갔다. 민심 수습은커녕 오히려 민심과 언론을 더욱 자극했다.

이기붕 부통령의 발표 전문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현 사태의 수습과 정국 안정을 기하기 위해 보수세력의 합동으로써 정당을 개편하고, 내각책임제를 기조로 한 정치제도의 개혁을 고려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당의 총재이신 이승만 대통령과도 이미 합의를 본 바 있다. 본인은 부통령 당선을 사퇴할 것도 고려한다.”

60년 4월23일 이기붕 부통령의 발표에서 ‘정국 안정’ ‘내각책임제’ ‘사퇴 고려’는 기시감이 들기에 충분하다. 내각책임제 제안인지, 사퇴 발표인지 불분명했던 이기붕의 발표는 박근혜 대통령 1~3차 담화와 닮았다. 56년 전 그날도 기레기 신문은 “이기붕씨 내각책임제 실시 고려”라는 제목으로 떨어져 나간 이기붕의 목을 붙잡았다.

내무장관과 국방장관이 국무회의 결과를 전달한 날(22일) 밤 이기붕은 한갑수 비서에게 사퇴 발표문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한갑수 비서가 밤새 발표문을 만들어 다음날 아침 서대문 이기붕씨 집에 들어가니, 집안 공기가 달라졌다. 자유당 강경파들이 “노(老) 대통령이 돌아가시면 당신이 중심이 돼 나라를 이끌어 나가야 되는데 지금 사퇴하느냐”고 밤새 다그친 것이다. 이렇게 한갑수가 밤새 작성한 발표문은 휴지가 됐다. 지금 친박들이 하는 게 자유당 강경파와 닮았다. 이기붕과 자유당 강경파의 잘못된 선택은 주춤하던 시위에 기름을 부어 결국 이승만 대통령 하야까지 불렀다.

그해 4월25일 저녁 2만여 시위대는 서대문 이기붕 집으로 몰려갔다. 이기붕은 가까스로 후문으로 피신했다. 4월26일 이승만은 하야하고, 28일 새벽 이기붕 부부와 두 아들은 경무대 별관에서 권총자살했다. 함께 죽은 부인 박마리아는 ‘이화여대’ 부총장을 지냈다. 슬픈 역사는 늘 반복된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