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지난 9일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 속에 파묻혀 환호작약했다. 촛불이 최고권력자를 응징한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탄핵 찬성 234표에 담긴 다양한 정치적 의미가 박근혜 즉각 퇴진 촛불민심을 그대로 웅변했다. 군부독재 시절 피를 먹고 자라던 민주주의의 나무는 21세기 촛불을 결실로 맺었다. 기득권 옹호에 급급하던 대의민주주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거리와 광장의 직접민주주의는 강력하고 유연했으며 호소력 깊었다. 헌법 1조 주권자로서 국민의 위상을 명징하게 확인시킨 시민들의 힘은 위대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의 염원을 담은 노랫말 따라 소등한 촛불들이 일시에 켜질 때 내 마음의 어둔 구석에도 광명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국회 탄핵이 결정된 후 헌법재판소와 대선의 시간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700만명이 넘는 촛불시민들의 염원이 담긴 즉각 탄핵을 300명의 국회의원들이 결정하더니 이제 박근혜 대통령의 운명이 9명의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에게 달렸다. 탄핵을 이끈 광장민심은 다시 제도권 담벼락을 넘지 못한 채 애태우며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결정권이 소수에게 위임된 채 다수 주권자들의 요구는 제도권 바깥에서 분노한 함성으로 울리고 있을 뿐이다. 상수가 돼야 할 국민 의견이 불안정한 변수로 바뀌는 지점마다 강고한 기득권을 유지해 온 구체제가 버티고 있다. 구체제의 정치일정에 따라 분노한 민심의 흐름이 지체되고 왜곡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박근혜 퇴진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구조와 사회경제구조 전반의 근본적 개혁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1997~98년 외환위기를 분기점으로 한국의 노동시장은 양극화와 하향평준화로 치달았다. 민주개혁 정부 10년,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을 통틀어 기본적으로 친기업적인 노동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지체된 채 한국 사회는 가장 나쁜 형태의 격차사회로 전락했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내외로 고착된 조건 속에서 비정규직 양산과 차별 심화·확대가 가속화했다.

비정규직 문제 개선에 소극적인 중앙정부와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을 도외시한 국회, 정규직 중심 조직노동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비정규직 문제 개선과 해결을 둘러싼 주객관적 조건이 사면초가에 갇힌 형국이 오래도록 지속됐다. 구두선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노동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이 갈수록 요원해졌다. 광범위한 저임금·불안정 노동계층 형성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 후퇴를 불러온 주요한 원인이 됐고, 정치민주화의 성과마저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2006년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법'은 한국 사회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를 개선할 호기였다.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입법화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지만, 노무현 정부가 기간제한 방식의 무기계약직 전환과 실효성 없는 차별시정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전기 마련에 실패했다. 비정규직 보호법은 중규직으로 불리는 무기계약직을 양산해 고용안정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노동계 우려대로 초단기계약과 간접고용 비정규직 전환(풍선효과)을 가져와 부정적 효과가 더 컸다.

암울한 시기를 지나 올해 4월 총선을 통한 여소야대 국회 성립은 정세 반전의 계기를 제공했다. 친재벌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으로 인해 유실됐던 비정규직 권익보장을 위한 입법대책이 다시 주요 정치적 의제로 부각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도 예기치 못한 촛불항쟁이 들불처럼 번지며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권력사유화의 백태를 보여 주며 온 국민을 충격으로 몰고 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몸통이 재벌이라는 것도 드러났다. 한국 자본주의의 민낯이었다.

노동이 기반이 되는 민주주의가 지금처럼 중차대해진 때가 없었다. 국민 중 최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고선 한국 사회의 선진화와 정상화는 무망하다. 1%의 기득권층이 독식한 잘못된 사회경제구조를 개혁할 호기가 촛불항쟁에 힘입어 찾아왔다. 실패로 점철된 비정규직 문제 개선과 해결을 위한 절박한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이제 촛불항쟁의 목표는 정권 퇴진을 넘어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과제 쟁점화와 실현으로 옮겨 가야 한다. 주권자의 힘으로 천민자본주의 한국 사회를 바꿀 청사진을 설계하고 대안을 만들어 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선결과제인 1천만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익신장을 2017년 새로운 정부를 매개로 기필코 이뤄 내야 한다. 절박하면 이뤄진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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