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준상 전 KBS 이사

지난해 7월 삼성물산-제일모직(옛 삼성에버랜드) 합병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함께 국민연금은 왜 지탄의 대상이 될까. 자명한 듯한 물음을 던지는 이유가 있다. 아주 묘한 문제의식을 담은 글들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어서다. 하나는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회가 결정하지 않고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 민감한 사안을 넘기는 것을 ‘보신주의’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때는 보름 전 SK와 SK C&C 합병 때와는 달리 투자위원회가 결정했는데, 불행하게도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는 식이다.

또 다른 시각은 당시 합병에 반대했던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올해 10월5일 삼성전자 이사회에 삼성전자 분사와 특별배당 30억달러, 2016~2017년 미래현금흐름(FCF)의 75% 배당을 요구하는 제안서를 보냈다면서 당시 합병에 반대했던 엘리엇매니지먼트의 행동마저 잘못된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글들을 보고서다.

필자가 과민하게 해석하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삼성전자는 엘리엇의 요구를 거부하고, 올해 11월30일 지주회사 전환을 처음으로 공론화하면서 미래현금흐름 50% 배당, 내년 1분기부터 분기 배당 실시, 기업구조 분할과 지주회사 전환은 향후 6개월간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 뒤로 삼성전자 주가는 신기록을 세우며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엘리엇의 배당 요구액과 삼성전자의 배당 계획 차이는 5조4천억원이다. 미래현금흐름 50% 배당은 2017년 연간 4조원이니까 75%면 2조원이 늘어난 수준이고, 특별배당 30억달러(약 3조4천억원)를 더하면 이 정도 차이가 난다. 현금 보유액이 65조~70조원에 이르는 삼성전자가 그다지 부담스러워하는 규모는 아닌 듯하다. 주주들한테 배당하느니 납품단가 인하로 어려움을 겪는 협력업체의 고통을 줄이는 데 사용하는 게 낫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삼성전자가 엘리엇 제안을 거부한 실제 이유는, 기업 분할합병 과정에서 자사주가 의결권 있는 주식으로 둔갑하는 것과 관련해 국회에서 제동이 걸릴지 지켜보자는 차원에 있는 듯하다.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을 각각 분할해 지주회사 간 합병을 꾀하는 게 삼성그룹 거버넌스 개편의 유력한 시나리오의 하나로 꼽힌다.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 지분 17.1%,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2%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두 회사가 각각 분할한 뒤 지주회사끼리 합병하면 이 부회장의 지배력은 공고해진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주식의 0.6%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은데, 아버지의 지분 3.6%를 상속받고 지주회사 간 합병에서 삼성전자의 자사주 13.3%가 의결권 주식으로 둔갑해 이 부회장에게 신주배당이 되면 그의 지분이 안정적으로 상승하면서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본론으로 돌아오자. 국민연금이 지탄받는 이유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었음에도 부당한 합병비율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데 있다. 합병에 반대하겠다고 나섰다면, 제일모직 대 삼성물산 합병비율은 1대 0.35에서 최소한 1대 0.418 정도로 바로잡을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다. 이를 통해 국민연금의 합병회사 주식수가 늘어나고 최소한 778억원의 연금자산 가치를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합병비율 조정이 어렵다고 이 부회장이 답변하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이를 수용했다는 게 핵심이다. 이때 국민연금은 삼성전자에 특별배당을 요구하다 거부당하는 엘리엇과 같은 처지가 아니었다. 국민 노후자산에 대한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를 짊어진 책임자였다.

엘리엇의 특별배당 요구는 삼성전자라는 기업의 자산을 줄어들게 하는 것이지만, 국민연금의 요구는 합병기업의 자산을 줄어들게 하는 일이 아니었다. 제일모직이라는 기업이 아니라 이 부회장 개인의 지분이 30.42%에서 28.88%로 줄어들면 그만일 뿐이었다. 이 1.54%포인트 지분의 가치는 4천758억원에 해당한다. 백번 양보해 이 부회장이 47억원이라는 돈으로 삼성그룹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상속세라도 제대로 냈다면 시민들의 분노가 이 정도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투자위원회가 결정하지 않고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 민감한 사안을 넘기는 것을 ‘보신주의’라고 보는 시각은 어처구니없는 것에 해당한다. 핵심은 ‘내부’ 전문가들이 국민의 노후 연금자산에 대한 선량한 관리자 의무를 방기한 반면 오히려 ‘외부’ 전문가들이 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서는 내 스스로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헤지펀드 엘리엇이 맞았고, 국민연금 투자운용본부가 왕창 잘못이었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주주행동주의에 한계가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서 나타난 국민연금 투자운용본부의 배임 행위는 주주행동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는커녕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팔아넘긴 행위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전 KBS 이사 (cjsang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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