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호 한국노총 조직본부 교육국장

영화 <자백>의 내용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이유는 현재가 아닌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현재를 보여 주는 실화이기 때문이다. <자백>은 국가정보원이 화교 출신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을 파헤친다. 유씨는 지난해 10월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이 중국 공안의 자료를 위조하고, 유씨의 동생을 감금·회유·협박·폭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여기까지는 최근의 일이다.

<자백>은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지금까지 자행된 '간첩조작사건' 전체를 이야기한다. 그 중심에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있다. 그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재직했던 1975년부터 1년 동안 가장 많은 간첩단 사건이 일어났는데, 후일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자백>의 마지막 부분, 최승호 PD는 김기춘을 만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을 묻지만 그는 “알지 못한다” 또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하며 자리를 피한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미래인 오늘에도 작동하고 있다는 <자백>이 주는 공포. 그런데 그 공포의 시스템은 운이 없어 간첩에 몰린 (그러나 그가 내가 될 수도 있는) ‘한 사람’을 넘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최근 며칠 국민은 보기 힘든 장면들을 TV를 통해 지켜봤다. 평소라면 볼 일도 없는 재벌 2·3세들이 한 줄로 서서 선서를 하고, 질의에 답했다. 40년 전 대공수사국장도 청문회에 섰다.

그러나 화면에서 우리가 목도한 것은 ‘희망’보다는 ‘절망’이었다. 촛불의 힘에 떠밀려 나온 재벌 총수들의 “잘못했습니다”라는 반성이 ‘운이 없음’ 때문인지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공포에 기인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모든 질문에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관한 김기춘의 모습 역시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 재벌 회장 앞에서 펼침막을 든 비정규 노동자의 입을 틀어막고 넘어뜨린 그 손, 침몰하는 배 안에서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는 마지막 문자를 보냈던 7시간을 말하지 않으려 하는 그 입, 한 끼니도 되지 않는 최저임금, 그마저도 받지 못하는 서민들의 애타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는 그 귀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공포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다.

하기에 9일 국회에서 결정될 탄핵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물론 시민의 힘으로 정권을 끌어내린 승리의 기록은 벅차게 간직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 42일 동안 전국의 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운 수백만의 촛불이 가고자 하는 방향은 청와대가 아니라 그 너머 새로운 사회다. 촛불은 탄핵을 넘어 민중의 구체적인 행복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우리는 그동안 시민들을 짓눌러 온 구태들을 깨끗하게 청산해야 한다. 다시는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김범신 신부는 악령에게 묻는다. “거짓말의 아버지이자 태초의 살인자여, 어디서 온 것이냐.” 악령은 대답한다. “우리는 여기에도 있었고, 저기에도 있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들을 뿌리 뽑지 못한다면, 미래의 과거가 될 오늘의 이 적폐들은 다시 이 땅의 여기, 저기에 숨죽이며 숨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노릴 것이다. 그래서 촛불은 다시 시작된다.





한국노총 조직본부 교육국장 (labo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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