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노동자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의 문턱에서 좌절된 1945년과 1960년의 역사적 기회를 노조간부로서 경험했던 노동운동가. 이승만 독재권력의 수족으로 부역했던 대한노총 개혁의 중심인물 김말룡. 지난 10월3일에는 마석 모란공원에서 2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김말룡은 일제 강점기인 1927년 태어나 10대에 노동자 삶을 시작했다. 45년 조선기계제작소 노조 선전부장을 맡으며 노조활동에 뛰어들었다. 45년 11월5일 노동자 대중의 총연합단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출범했다. 곧이어 전평을 붕괴시키기 위해 46년 3월10일 우익계 노동조합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결성됐다. 대한노총은 자유당 창당의 기간단체 역할과 이승만 휘하 돌격대 역할을 수행했다. 부정부패의 온상이었고,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완벽하게 상실한 어용 최상급 단체였다.

반노동자적 행위가 극에 달해 50년대 말 조직혁신의 반성적 흐름이 일어났다. 대한노총 조직부장과 경북연합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김말룡은 주동적 역할을 했다. 지하로 숨었던 전평의 이수갑 선생은 김말룡을 만나 대한노총 해체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그를 고무시켰다고 한다. 선생은 김말룡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정체를 모를 정도로 주의하며 대한노총 해체와 민주노조운동 재건을 위한 노조민주화 사업을 했다고 생전에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다.

59년 8월 당시 김기옥 위원장 체제의 반대파들이 혁신을 기치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를 구성했다. 대한노총 541개 단위노조 중 311개 노조, 27만명의 노조원 중 14만명이 대한노총을 탈퇴하고 전국노협에 가입하겠다고 했다. 같은해 10월 전국노협은 김말룡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결성대회를 열었지만 정부는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듬해 4·19 혁명의 후방효과로 노조 민주화의 숨통이 트였다. 심지어 부산 부두노동자들이 김기옥 대한노총 위원장 집을 급습해 규탄시위를 했다. 다른 지방에서도 노조 간부들에 대한 규탄시위가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5월9일 대한노총 간부들이 총사퇴를 했다. 전국노협은 170여개 단위노조, 16만명의 조합원을 포괄했다. 사회 전반적인 민주화 열기 속에서 60년 11월25일 대한노총계와 전국노협계, 대한노총을 탈퇴했거나 신규 조직된 노조 등 전국 대의원 725명이 참석해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강제해산을 당하고 만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전국의 노동조합을 재결성하게 했다. 한국노총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김말룡은 저항하다 구속된다. 50년대 후반에 시작된 노동운동 혁신의 기운은 60년 4월 혁명의 시기에 잠시 선잠을 깬 듯 지나가고 다시 오랜 동면기를 거쳐야 했다. 74년 노동운동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김말룡의 노조 민주화투쟁은 계속됐다. 45년 이후 정국의 소용돌이에서 시작된 그의 옥살이는 6차례나 이어졌다. 당시 유명한 '빵잽이'였다.

김말룡은 노동운동 일선에서 물러난 후 78년 천주교 노동사목위원회를 설립했다. 노동문제상담소를 열어 힘없는 노동자의 벗으로 일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본격화하기 전인 92년 국회의원이 돼 노동자 투쟁에 열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철도와 지하철 파업, 한국통신노조 투쟁, 전해투의 병역특례 해고자 조수원 열사 분신, 한국전력 김시자 열사 분신 사망 현장에 어김없이 나타나 고군분투했다. 96년 1월 김시자 열사 분신공동대책위원회 활동을 하던 필자와도 한일병원 영안실에서 만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하고 격려하기도 했다. 필자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같은해 봄 인천 계양갑에 출마했다가 재선에 실패했고, 10월 불의의 심장마비로 애석하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사망 전날까지도 민주노총에서 노동법 개정 문제와 관련한 회의를 갖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60년 4·19 혁명기의 한국 노동계급은 미군정과 한국전쟁, 이승만 독재로 체제내화돼 있었던 탓에 거대한 민중항쟁을 혁명의 완수로 이행시키는 역사적 소임을 조직적으로 담보하지 못했다.

박정희 반혁명 세력에 의해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기회. 후일을 기약했지만 암흑의 세월은 참으로 가혹했다. 반면에 59년 1월1일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에 성공한 쿠바는 같은 시기 다른 사례로 남았다.

혁명의 완수를 향해 헌신하던 체 게바라는 이렇게 노래했다.

"아름다움과 혁명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손 끝에 달려 있다."

지금 명예혁명·무혈혁명의 광장에 서 있는 노동자 민중의 손끝은 과연 어떤 결론을 현실화할 것인가. 저 부패하고 무능한 앙시앙 레짐 권력의 바리케이드를 뚫어야 한다. 이번에는 변혁적 전망과 권력의 주체들이 역사에 멋진 승리를 기록하자.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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