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심장이 마구 뛴다. 광화문광장에서 170만개의 붉은 촛불에 새가슴이 벌렁거려 나는 진정이 되지 않는다. 이 나라 최고권력 대통령의 퇴진을 위한 국민의 행동은 2016년 12월3일, 전국의 광장과 거리에서 232만개의 촛불로 붉게 타올랐다. 이른바 국가원로들이 권고하고, 새누리당이 당론으로 의견을 모았다는 ‘명예로운 퇴진’이니 ‘질서 있는 퇴진’을 수용해서 했다는 대통령 박근혜의 3차 대국민 담화문을 대한민국 국민은 촛불로 불태워 버렸다. 임기단축 등 여야가 합의해서 국회가 정해 주면 그에 따르겠다는 대통령 박근혜의 담화에 주저앉았던 새누리당 비박계, 소추의결정족수 확보의 어려움을 내세워 우왕좌왕하던 국민의당에 대해 국민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심판 대상이 될 수가 있고, 핑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국민은 촛불로 단호하게 말했다. 즉각 퇴진시키라는 국민의 명령은 국회의원에게 자신이 할 일을 하라고 탄핵에 나서게 했다. 무질서한 퇴진에 따른 국정혼란의 우려와 차기 대권 계산을 단숨에 국민을 기만하는 짓이라고 촛불을 들고서 국민은 선언해 버렸다. 바야흐로 오늘은 광장의 날이다. 청와대와 국회 권력이 아니라 국민의 날이다. 광장에서 “박근혜 즉각 퇴진”이라는 국민의 명령이 곧 국가 대한민국의 의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국민이 스스로 주권자로 행동하는 날이다. 오랜만에 심장이 촛불에 놀라 마구 뛰는 날이다.



2. 비극적이다. 대한민국의 광장은 국민의 행동으로 넘쳐나고 있는데 비극적이다. 민주주의 투쟁에서 더 나은 민주주의로 주장하지는 못한다. 노동운동은 그저 노동개악, 국정농단 헌법파괴의 박근혜 퇴진에 머물고 있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알지 못하니,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니 노동자는 주장하지 못한다.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고작 노조운동인데 노조에서 가진 민주주의가 보잘것이 없다. 그러니 국가수준에서 노동자는 민주주의를 주장하지 못한다. 오늘 광화문광장에서 노동운동은 비극적이다.

‘민주주의여, 너는 어디까지냐.’ 한 나라의 인민인 국민이 주인이 되는 원리로 민주주의를 읽어 내고서 보자면 이 나라에서, 이 세상에서 보장된 것은 보잘것이 없다. 이 세상의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기도 어렵다. 소통이 시간과 거리로 어렵다는 필요에서 정당화하고 수긍해 왔던 것이, 그래서 그것은 지배의 원리일 수밖에 없었던 이 세상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 시간과 거리가 소멸하기 시작한 이 소통의 시대에서는 이제 낡아빠진 것이 되고 있다. 오히려 민주주의 전진의 발목을 잡는 유물이 돼 가고 있다.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민주주의로 보자면, 주인이 대표에 맡겨 놓고 스스로는 하지 않는 것은, 주인이 배제된 원리이고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행동이 민주주의다. 이미 대표에 무기속위임해 버린 세상에서는 구성원은 배제되고 만다. 구성원이 직접하는 행동이야말로 민주주의다. 오늘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퇴진을 위한 국민의 행동은 박근혜 일당이 죽인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운동이라고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광장에서 국민의 행동 자체가 민주주의다. 그 행동이야말로 진정으로 민주주의다. 그러니 지금은 민주주의로 보면 위기가 아니다. 더는 이 역동적인 국민의사를 대변하기에 힘에 겨워 하는 낡은 대의주의가 위태롭게 됐다고 해서 민주주의 위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걸 회복시켜야만 하는 위기가 아니다. 지금은 헌법 위반, 국정농단으로부터 정상상태로 되돌려야 하는 비상한 위기상태가 아니다. 위기를 말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것에, 주인을 권력자의 지배에 복종하는 것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짓이다. 지금은 민주주의 위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민주주의 실현인 상황이다. 광장에 쏟아져 나와 국민이 박근혜 퇴진의 의사를 결정짓고 그걸 집행하도록 하고 있는 행동이야말로 민주주의다. 대표에 의해 배제된 자들이 대표를 배제하는 민주주의야말로 진정으로 민주주의다. 이렇게 오늘은 위기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날이다. 마침내 온 민주주의 세상이라고 만세를 불러야 할 때다. 그럼에도 이것을 위기라고 규정짓고 국회 등에서 대표 국가기관의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기를 쓰고 있다. 여야 정치권만이 아니다. 광장에서 자신의 의사에 따르라며 박근혜 퇴진을 명령했던 국민조차도 빨리 탄핵해서 더는 광장에 나와서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하고 있다. 오늘은 광장에서 행동하지만 내일은 아니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기를 쓰고 있어도 아니다. 행동이 민주주의다. 그런데 거기에 민주주의를 위한 노동의 행동은 없다. 그래서 비극적이다.



3. 노동운동은 민주주의를 말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시대에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은 노동운동은 진보가 아닌 퇴행이다. 노동자 대중을 배제하는 지배의 원리를 두고서 하는 말은 아니다. 민주주의 없는 노동운동은 전진의 깃발이 아니다. 노동운동은 민주주의여야 한다. 그래야 지금처럼 혁명적 상황에서 매주 새로운 구호로 갈아 치우는 변혁의 시대에서 국민을, 노동자를 대변하고서 나아갈 수 있다. 즉시적으로 변심하는 노동자의, 국민의 의사에 따른 조직 재구성이 이뤄지고 내일 국민이 노동자가 외칠 구호를 앞서 제시해 나갈 수 있는 운동의 원리와 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어제의 구호를 내세웠던 자들이 변심한 국민의 의사를 읽느라고 허둥대는 노동운동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허둥대다 말 수가 있다. 노조냐, 무슨 혁명적 노동자조직이라는 비합법조직이냐, 그것이 부족하고 존재하지 않아 발목을 잡는다고 변명할 일이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껍데기라도 민주주의냐 아니냐, 구성원의 의사에 즉시적으로 반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세계 노동운동사에서는 노조로도 얼마든지 시민혁명 등 변혁운동에 나선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어찌 보면 대중 아래에 숨은 비합법 조직은 오히려 민주적인 작동원리를 보장하기 어렵다. 일부 선진 부분의 조직은 그 자체로 나머지 대다수를 배제하고 서 있다. 그만큼 비민주적이다. 정당도 그렇다. 민주의 당이든, 노동의 당이든 모두가 아닌 일부 선진 부분이 대표로 운영되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배제를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조직이다. 노조 조직률이 문제가 아니다. 10% 안팎의 조직률 때문에 오늘 전체 노동자를 행동에 나서도록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다. 대중행동의 역동성이 지배하는 이 국민행동의 날에는 배제 없는 민주주의를 노동운동에서 실현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낡은 민주주의에 그 조직 틀에 갖힌 채 운동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민주주의면 즉각 노동자가 행동하도록 나서야 한다. 그걸 위해 노동자조직체가 필요하다면 즉시 그걸 위한 선전·교육·행동에 나설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다. 중요한 것은 노동운동에서 민주주의가 문제라는 것, 그것이 오늘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의 비극이다. 노동운동에서 민주주의의 결핍이 비극이다.



4. 노동운동은 민주운동의 하나고, 민주운동의 미래여야 한다. 노동운동은 민주운동의 결과이면서 새로운 민주운동이어야 한다. 노동운동은 민주운동에서 탄생했다. 노동운동사에서 제기해 왔던 민주주의, 인민주권주의니 소환제 민주주의니 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대의제 의회민주주의를 극복하고자 시도해 온 노동자의 민주주의조차도 시민혁명에서 터져 나왔던 민중의 투쟁에서 태어났다. 프랑스대혁명에서 파리코뮨에 이르는 프랑스혁명사의 선언문들에서는 노동운동이 제기해 온 민주주의의 원형질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차라리 노동운동은 민주운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읽혀질 지경이다. 노동운동은 민주운동의 원리로 조직됐다. 민주운동에서 전개돼 온 대의제와 그 대의제의 극복원리까지도 노동운동에서 그대로 전개돼 왔다. 민주운동에서 대의제와 직접제의 투쟁은 노동운동에서의 투쟁이 됐다. 그리고 오늘 노동운동은 대의제로 서 있다. 우리의 노조운동도 마찬가지다. 세계 노동운동사에서 노동자의 세상이라고 내세웠던 사회주의국가도 결국 대의제의 변종이었다. 노동운동에서 직접제는 변명거리고 껍데기였다. 대의제 의회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자본의 세상을 비난하는 수단으로만 말했을 뿐, 노동운동이 세웠다는 세상에서 그걸 실현하지도 못했다. 그걸 실현해 내겠다고 그걸 위한 노동자대중의 거대한 투쟁도 일으키지 않았다. 더 철저한 대표에 의한 절대지배의 원리가 노동자의 민주주의라며 민주주의를 짓밟아 버렸다. 거기서 노동운동은 더는 민주운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노동자는 민주운동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노동운동이 나아가도록 해야만 한다. 그것으로 진정으로 노동자권리가 실현되는 나라, 노동자가 노예가 아닌 주인인 세상을 위해서 노동자는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소유권으로 세상을,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로 세상과 시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운동의 미래, 내일의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예단하기 어렵고, 위험하기조차 하다. 아무리 정확히 예견했다고 해 봐야 그건 그저 무당의 점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우주의 기운이 아니라 노동자대중과 국민의 행동으로만 배제 없는 민주주의를 세워 낼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이렇게 노동운동의 민주주의는 노동자대중이 스스로 결정하는 행동이고, 그 행동으로 올 것이라고 나는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민주주의는 노동운동의 원리여야만 한다. 위원장, 대의원의 선출행위가 돼 버린 노조의 민주주의는 조합원 노동자대중을 배제하고 노조권력을 세우는 지배의 원리일 뿐이다. 거기서 노동자대중은 대표가 결정하고 집행하는 대로 따라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3분의 2 이상이라는 특별의결정족수로만 가능한 현행 노조 규약상 해임제로는 조합원의 의사에 따른 대표 소환제로 기능할 수 없다. 노조의 의사 결정과 집행에서 노동자 조합원의 의지가 관철되도록 하는 규약상 제도는 미비하다. 위원장, 대의원 등 대표의 일일 뿐이다. 이런 노조에서는 노조는 그들의 일이지 노동자 조합원의 일이 되지 못한다. 이런 노동자 조합원들이 어떻게 이 민주주의 투쟁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도 광화문과 전국의 광장에서 국민으로서 함께 행동할 뿐이다. 국회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절차로 주권자로서 국민의 행동을 멈추는 그런 보잘것없는 민주주의를 노동운동이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노동운동이 민주주의를 말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내일은 다른 자들의 차지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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