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책으로 배우고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권력투쟁의 실재가 현실에서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있다. 운동과 민중이 만들지도 못했고 주도하지도 못한다는 아쉬움이 크지만, 그 실상을 생생하게 목격하며 경험하고 있다. 살아 있는 공부고, 큰 행운이다. 하지만 운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마냥 들뜰 수만은 없는 초라한 처지가 내포돼 있다.

재벌과 청와대와 조선일보는 하나였다. 그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 철저히 한 몸이었고, 대한민국을 밑바닥까지 ‘나뿐인 나쁜 사회’로 만들며 농락했다. 진보도 물들게 만들 만큼 막강한 지배동맹이다. 그런 지배동맹 내부에서 청와대와 조선일보로 금이 가더니 마침내는 대통령 퇴진 국면이라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전율을 느낀다. 권력투쟁은 저렇게 사생결단하면서 치밀하고 집요해야 끝장을 보는 것이다. 운동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저들처럼 저렇게 해 왔는가, 지금이라도, 또 앞으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배집단은 촛불까지 이용한다. 박근혜 일당을 제외한 모든 보수가 촛불 키우는 일에 팔을 걷어붙였다. 그들이 가세해 100만이 되고 200만이 됐다. 조선일보가 민중총궐기를 홍보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촛불 드는 국민이 만만하게 보여 그런 것이다. 지배동맹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통제했고 앞으로의 상황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다. 운동을 얼마나 호구로 보기에 저러고 있을까. 운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괴감이 든다.

유럽의 한 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본다. 노동조합들은 퇴진할 때까지 매일매일 쉬지 않고 총파업을 벌일 것이다. 기계가 멈추고 철도·지하철·비행기·버스가 서고, 노동자 수백만 명이 앞장서 거리로 나설 것이다. 국민은 불편해도 총파업에 박수를 치며 환호할 것이다. 학생들은 매일 동맹휴학을 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분노한 국민은 관련 재벌기업들의 매장을 부술 것이다. 사회는 그 행동을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유럽 상황이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매일매일 전면 총파업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다. 민주노총은 단 하루 4시간 파업으로도 허덕댄다. 국민의 지지가 전폭적인 것도 아니다. 이 정파 저 정파 가릴 것 없이 가치운동을 하지 않고 이익운동을 해 왔던 노동운동의 업보다.

동일한 방식으로 일주일을 반복하는 촛불을 둘러싸고 운동 내부에서 격한 논란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차벽을 넘자는 논쟁 말이다. 이 점과 관련해 염두에 둘 것이 있다. 한 발 더 나서고자 하는 행동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답답함과 의욕만 앞서 행동을 결행하면, 되레 대중과 괴리되고 지배동맹의 먹이가 돼 촛불을 꺼 버릴 수 있다. 기껏 수백 명 수준에서 몸싸움하고 수십 명 수준에서 차벽 넘는 것으로는 자기만족 말고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그것은 맹동주의다.

지금 운동이 유력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나마 운동이 촛불 기획자 역할이나마 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촛불이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을 하자.

촛불에 나오는 국민은 박근혜 퇴진의 필요성을 운동보다 더 잘 알고 절박하게 염원한다. 운동은 한발 더 나아가 박근혜 퇴진 구호와 주장에 '새로운 세상'이라는 꿈을 입혀야 하지 않을까. 물론 지금까지도 다양한 주장의 연사를 배치하면서 그렇게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언 발에 오줌 누기다.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싶다. 매주 촛불을 ‘주제촛불’로 진화시킨다. 매주 한 주제를 선정해 그와 연관된 단위들이 모여 촛불을 기획한다. 그 주제와 연관해서 왜 박근혜 체제(그렇다! 박근혜만이 아니다. 온 나라 밑바닥까지 이윤과 갑질과 차별·혐오가 판치는 박근혜 체제를 드러내야 한다!)가 문제인지, 그러면서 박근혜 체제 이후 새로운 세상의 대안과 희망을 그린다. 한 주는 여성, 한 주는 청소년, 한 주는 청년·학생, 그런 식으로 상인·노동·평화·녹색·소수자·세월호·재벌 책임·농민·빈민 등을 주제로 촛불집회를 한다. 여성이 그리는 다른 세상의 꿈, 비정규직과 하청노동자가 그리는 새로운 세상의 꿈…, 매주 촛불에 나오는 국민에게 재미와 학습과 꿈과 변화라는 1석4조의 효과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광화문과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촛불을 켜는 순간에도, 지배동맹 체제는 외려 강화되는 모순이 벌어지고 있다. 비정규직이 늘고 환경이 파괴된다. 청년의 처지는 더 악화된다. 여성과 장애인과 소수자들은 가슴을 졸인다.

촛불은 언젠가 사그라진다. 촛불이 꺼지기 전에 불씨를 보존해야 한다. 촛불이 새로운 희망세상을 꿈꾸며 골목으로, 장터로, 술자리로, 가정으로, 직장으로 들어가야 세상을 조금이라도 희망차게 바꿀 수 있다. 꿈꾸지 않는 촛불은 한국 사회를 개조하지 못한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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