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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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구, 팔, 칠 (…) 삼, 이, 일, 소등!"

130만개 촛불로 일렁이던 서울 광화문광장이 "소등"이 외쳐진 순간 삽시간에 암흑천지가 됐다. 1분간 이어진 어둠 속에서 시민들은 입을 모아 소리쳤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지난 26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즉각 퇴진 5차 범국민행동'의 하이라이트는 저녁 8시 정각에 진행된 '저항의 1분' 소등행사였다.

"박근혜 정권 생명연장의 꿈이 꺼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전국적으로 함께한 '1분간의 저항'이었다. 카운트다운을 세는 시민들의 외침에 따라 촛불과 휴대전화, 무대조명이 한꺼번에 꺼졌다. 광화문과 경복궁 일대가 마법처럼 암흑에 잠겼다. 인근 일부 상점들도 가게 불을 끄며 동참했다. 환하게 불이 켜진 정부서울청사를 향해 시민들은 "불 꺼라"를 외쳤다.

1분 뒤 다시 촛불의 바다가 펼쳐졌을 때 사회자는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며 "우리는 모였기 때문에 강하고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바꿔 낼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녀들과 함께 촛불을 든 40대 남성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멋지다"며 "아이들에게 이런 멋있는 집회를 보여 줄 수 있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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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비 뚫고 모인 시민들=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에 따르면 이날 5차 범국민행동에는 오후 9시40분 기준 서울 광화문 150만명, 지역 40만명을 합쳐 전국적으로 190만명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을 들었다.

이날 서울에는 낮부터 눈비가 내리고 기온이 떨어졌다. 앞선 집회 때보다 저조한 참석률을 보이지 않을까 우려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오후 4시께 청와대 인간띠 잇기 사전행사를 하는 동안 눈비가 그쳤다. 참가자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우려 섞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율곡로와 사직로는 물론이고 종각 방면 SK 본사, 서대문 방면 금호아시아나 본사, 서울시청 방면 한화생명 앞까지 촛불을 든 시민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수도권 조합원들과 촛불집회에 참석한 박표균 국민건강보험노조 위원장은 눈비가 그친 하늘과 끝없이 이어지는 집회행렬을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박 위원장은 "날씨가 안 좋아 혹여나 청와대가 '하늘이 우리를 도왔다'고 오판할까 봐 걱정했는데 역시 하늘은 박근혜 편이 아닌 민중의 편"이라고 웃었다.

예상대로 가족단위 참가자들이 많았다. 두살배기 딸을 데리고 대전에서 올라온 김민호(32)·이경실(31) 부부는 "지난주 딸아이의 두 살 생일을 기념해 여행을 가려다 '나라가 망할 것 같은데 무슨 여행이냐'며 서울에서 열린 4차 범국민행동에 참가했었다"며 "딸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주기 싫어서 오늘도 KTX를 타고 왔다"고 말했다. 딸을 태운 유모차 앞에는 "이러려고 태어났나 자괴감 들고 괴롭다"는 손팻말을 달았다.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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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에는 '하야 축하 축제' 열었으면…"=이날 본행사에 앞서 오후 4시부터 '청와대 인간띠 잇기' 행사가 열렸다. 법원이 이날 오후 1시부터 5시30분까지 청와대 앞 200미터 거리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까지 행진을 허가하면서, 시민들은 청와대 턱밑에서 "박근혜 구속"을 외칠 수 있었다. 인근 한 커피숍은 가게 창문에 "9년 만에 처음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문구를 붙여 놓기도 했다.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 앞에서 만난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은 "정권과 재벌이 결탁해 노동자들을 탄압했다"며 "박근혜 정권을 하루빨리 처벌하고, 노동을 존중하고 노동 3권을 보장하는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와대 인간띠 잇기 행사 전부터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민주노총 깃발과 풍물대를 앞세운 본대오가 모습을 드러내자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경기도 안산에서 온 김창균(34)씨는 자유발언을 통해 "박근혜 퇴진 촉구 집회는 오늘로 끝내고, 다음주에는 '박근혜 하야 축하' 축제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해 호응을 이끌어 냈다.

집회 중간에 파란색 대형 고래풍선을 하늘에 띄운 세월호 유가족들과 차량이 도착하자 참가자들은 길을 터 주며 이들을 응원했다. '세월호 7시간'을 숨기고 있는 청와대 앞에 띄워진 고래풍선을 바라보며 시민들은 "세월호를 인양하라"고, "7시간 규명하라"고 촉구했다.

◇"끝내 이기리라~" 떼창=오후 6시부터 이어진 본행사 무대에 오른 가수 안치환씨와 양희은씨가 분위기를 뜨겁게 달궜다. 특히 양희은씨가 '상록수' 가사 중 "끝내 이기리라" 부분에 다다르자 시민들은 '떼창'으로 따라 불렀다. 안치환씨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하야가 꽃보다 아름다워'로 개사해 불러 열띤 반응을 끌어냈다.

민주노총은 시민들에게 "30일 민주노총의 정치총파업에 함께해 달라"고 호소했다. 최종진 위원장 직무대행은 "박근혜는 즉각 퇴진하고 불법적인 노동개악도 폐기하라는 파업"이라며 "적당하게 투쟁하다 중단하지 않고 정권과 재벌을 끝장내는 투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집회에 참석한 김주업 공무원노조 위원장은 "공무원들도 파업 집회에 참여할 것"이라며 "정부가 징계를 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징계를 받겠다"고 말했다.

오후 8시 '저항의 1분' 소등행사를 끝난 뒤 참가자들은 청와대 방면 8개 코스로 행진했다. 청와대 인근이 모두 경찰 차벽에 막히면서 참가자들은 차벽 앞에서 자유발언을 하거나 춤을 추며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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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잠룡들도 대거 참석=이날 집회에는 야권 대선주자들이 대거 참석해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날 오후 청계광장에서 열린 결의대회에서 "반칙과 특권을 일삼고 국가권력을 사익 추구의 수단으로 삼아 온 가짜 보수 정치세력을 거대한 횃불로 불태워 버리자"고 말했고,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국민을 배반한 정부를 처벌하고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만들자"고 밝혔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본행사가 끝나고 밤 10시께 청계광장에서 시민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대통령 하야를 넘어 재벌·부패세력·친일세력·박근혜 부역세력·새누리당 청산까지 이뤄 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혜정 기자
구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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