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1937년 6월8일 화요일 충북 옥천 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 6학년, 13살의 육영수가 처음 상경했다. 서울로 수학여행을 온 거다. 당시 아버지 육종관은 서울 체부동에서 첩살림을 했다. 수학여행단은 서울에 오자마자 남산의 조선신궁부터 가서 신사참배했다.

육영수(1925~74)의 옥천읍 교동리 313번지 ‘교동집’은 대지만 3천평에 후원에는 8천평의 과수원을 갖춰 비원의 연경단과 맞먹었고, 집안에는 라디오는 물론이고 미제 포드 승용차와 영사기까지 두고 화물차도 있었다. 이 땅에서 20년대에 포드 승용차를 탔던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

충북 옥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육영수의 소풍날이면 교동집 하인은 지게에 음식을 싸 들고 따라왔다. 아버지 육종관은 둘째 딸 육영수의 곤충채집 숙제를 돕기 위해 차고에서 포드 차를 몰고 나왔다. 아버지 육종관은 전기회사가 교동집에 전기를 넣어 주지 않자 6킬로미터 떨어진 오리티강(금강 상류)에 수력발전소를 세우려고 일본인 기술자까지 불렀다. 결국 전기회사와 타협 끝에 전기를 넣었다.

10살 넘게 차이 나는 언니 육인순의 남편 홍순일은 만주 고등문관시험(요즘 행정고시)에 합격해 일제가 세운 괴뢰정권 만주국에서 과장으로 일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26살의 육영수 집안도 피난길에 나선다. 아버지는 딸 육영수를 먼저 부산으로 보내고, 옥천경찰서장이 마련해 준 자동차를 전라도쪽으로 보내고, 막차로 옥천을 떠나 영도에서 만났다.

50년 8월 중순 육영수는 피난수도 부산의 광복동 양장점에서 흰 양장에 흰 구두까지 맞췄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변변찮았던 전쟁통에 양장에 구두까지 맞춘 호사를 누렸다.

피난살이 부산에서 육영수는 정보장교 박정희를 만났다. 육영수의 외가쪽 먼 친척 송재천이 맞선을 주선했다. 송재천은 육군본부 정보국에 일하는 소위였다. 송재천은 자기가 모시는 상관인 박정희 소령을 천거했다. 박정희는 송재천의 대구사범 선배이기도 했다.

남로당을 배신한 박정희는 전쟁통에 승승장구해 중령 계급장을 달고 50년 12월12일 대구 계산동 천주교성당에서 결혼했다. 주례는 허억 대구시장이 맡았다. 신혼살림은 대구 삼덕동 셋방에서 시작했다.

한국전쟁 3년 동안 박정희는 소령에서 준장(53년 10월)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58년 봄 큰딸 박근혜가 장충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박정희 부부는 신당동에 대지 100평에 건평 30평짜리 큰 집을 샀다.

사람들은 영부인 육영수를 검소한 인물로 기억하지만 집안 내력이 검소와는 애당초 거리가 멀다. 모두 언론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이미지일 뿐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포드 승용차를 타고 여름방학 숙제를 했던 사람이 검소가 뭔지나 알까.

기자들에게는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 와중에도 지난 14일 구미에서는 ‘박정희 탄생 99주년 행사’가 열렸다. 행사장을 취재한 국민일보 기자는 “노동단체 관계자 5명도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고 썼다.(국민일보 11월15일자 12면) 같은날 한겨레는 13면 사진기사에서 “아사히글라스화인테크노코리아 사내하청업체 해고노동자 5명”이라고 정확히 박았다. 국민일보가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들의 피맺힌 절규를 제대로 보도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피켓을 든 5명의 남자가 누군지 알 턱이 없다.

해방 이후 최대 국정농단에 혹여 판이라도 깨질까 두려움에 떠는 문화일보는 <보수단체도 “박, 수사협조 약속 지켜라”>는 제목의 기사를 21일자 12면 머리기사로 배치했다. 기사 본문에는 “정유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관계자”라는 이상한 문장이 나온다. 흔히들 ‘관계자’는 익명의 취재원에게 붙이는데, ‘정유림’이란 실명과 소속단체 이름까지 밝혀 놓고 뜬금없이 ‘관계자’라고 썼다. ‘직책’을 몰랐던 거다. 경실련 홈페이지만 검색해도 ‘정치사법팀 간사’라고 쉽게 알 수 있는데.

무지한 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이들이 또다시 역사에 덧칠이나 안 했으면 좋으련만.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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