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우리 언론사에 ‘80년 해직자’는 고유명사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언론인 700여명을 숙청했다. 이렇게 탄생한 5공 초기에 동료들은 해직돼 거리를 헤매는데, 권력을 좇아 정계로 뛰어든 기자들이 있었다. 이들 중 압권은 ‘동아 7인방’이다. 동아 7인방은 64년 동아일보 수습 6기로 입사한 10명 중 7명을 일컫는다. 입사 동기 10명 중 7명이 집권당에 봉사했으니 황당한 일이다.

동아 7인방이 입사한 64년은 기자협회가 창립하고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으로 언론자유 수호의 몸부림이 세찼다. 그만큼 기대를 받고 출발한 동아일보 수습 6기는 역설적으로 언론계 풍토를 흐려 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동아 7인방은 유경현·황선필·최재욱·이종률·정연춘·한태열·이상하를 말한다.

당시 동아일보 출신 중 가장 먼저 권력의 품에 안긴 이는 유혁인이다. 영남 출신인 유혁인은 60년대 동아일보의 청와대 출입기자를 지낸 뒤 정치부장을 거쳐 71년 청와대 비서실 정무비서관으로 권력에 들어가 80년까지 청와대 밥을 먹었다. 유혁인은 청와대 안에서 10월 유신을 주도했다. 유혁인은 먼저 동아일보 황선필을 끌어들였고, 박근혜 대통령의 영애 시절 테니스 파트너였던 유경현과 함께 동아일보 수습 6기 동기생을 집권당에 끌어들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황선필은 동아일보 6기 입사 때 수석을 차지했다. 황선필은 사회부·정치부 기자를 거쳐 유신 직후 73년 문화공보부 홍보조정관이 됐다. 76년 문공부 보도국장 겸 대변인으로 유신 1기 언론통제를 주도했다. 황선필은 79년 국무총리 공보비서관으로 갔다가 82년 청와대 공보수석 겸 대변인을 거쳐 86년 MBC 사장이 됐는데, 인사비리 등 전횡 때문에 5공 주구로 몰려 MBC노조의 거센 퇴진요구를 받았다. 황선필은 6공 출범에도 권력에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최재욱과 이상하는 88년 13대 총선에서 나란히 민정당 전국구로 진출했다. 최재욱은 경북고 출신으로 동아일보 정치부에 근무하다 군에 입대해 전우신문 기자를 지내고 제대한 뒤 동아일보에 복귀해 80년 9월부터 11월까지 석 달간 청와대 출입기자를 지냈다. 최재욱은 석 달 뒤 80년 12월 청와대 공보비서관으로 들어갔다가 86년 언론계로 복귀해 경향신문 사장이 됐는데, 사람들은 최재욱을 ‘차장급 사장’이라고 놀렸다. 88년 13대 총선에서는 민정당 전국구 20번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최재욱은 89년 윤길중 민정당 대표위원 보좌관을 했는데 청와대 대변인과 언론사 사장까지 지낸 사람이 할 일은 아니었다.

이종률은 정무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고 88년 13대 총선 때 민정당으로 출마해 서초갑에서 낙선했다. 정연춘은 정무장관 보좌관을 지냈고, 영애의 테니스 파트너였던 유경현은 79년 공화당 국회의원이 돼 당 대변인을 맡았다. 5공 때도 민정당에 가담해 81년 11대, 85년 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노태우 대통령의 직계였지만 88년 13대 총선에서 구례·승주에서 낙선했다.

82년에는 동아 7인방 중 3명이 동시에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황선필은 대변인, 한태열은 사정비서관, 최재욱은 공보비서관이었다.

동아 7인방 중 6명이 서울대 출신이다. 이상하와 유경현은 법학과, 황선필과 이종률은 정치학과, 정연춘과 한태열은 외교학과였다. 최재욱만 대구대 법학과를 나왔다. 동아 7인방 중 마지막까지 언론에 남았던 이상하마저 정치인으로 변신해 이들은 ‘스스로 언론인이길 포기한’ 대표집단이 됐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의 2차 사과 때 9분 동안 준비된 원고를 다 읽은 대통령이 기자들 앞으로 다가서자 움찔했던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동아 7인방의 후예들이다.

반면 경향신문 김경래 기자는 박정희가 감투를 주겠다는데도 거절한 유일한 언론인이다. 김경래는 80년 언론통폐합 때 사표를 내고 80년대 말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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