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2016년 11월12일, 대한민국은 위대했습니다. 그날 저녁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청와대를 향한 성난 100만 군중의 물결은, 서울 광화문을 중심으로 세종로·태평로·종로·청계로·을지로를 뒤덮고, 율곡로를 지나 자하문로 앞까지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자격 미달에 선거부정으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이, 무당 같은 한 여인에 의존해 국정농단을 벌인 정황이 드러나고, 거기에 함께한 청와대 비서들과 새누리당의 이른바 친박이라는 정치 모리배들의 추악한 모습들이 들춰지자, 실망과 분노를 넘어 허탈과 참담함에 국민으로서의 자존심이 갈가리 찢기고 짓밟힌 민중들이, 큰 강을 이루고 성난 파도가 된 것입니다.

대학생·청년은 말할 것도 없고, 중·고교 학생이나 부모 손에 이끌려 나온 어린아이들까지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지만, 중심세력은 여전히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깃발을 당당하게 들고 앞장선 조직된 노동자, 즉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었습니다. 파업대오 1만여명의 철도노조 조합원들을 비롯해 전국에서 서울로 집중한 투쟁사업장 조합원들의 모습은, 박근혜 정권을 몰아내는 일이 자기 사업장의 요구를 앞당기는 싸움임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박근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총궐기 투쟁은 단지 무자격의 부도덕한 범법자인 한 대통령을 퇴진시키는 차원을 넘어, 낡은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한판 큰 싸움임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민중총궐기 투쟁에 앞서 서울광장과 주변 일대 모든 도로를 점거하고 열렸던, 전태일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가 잘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과 그 패거리들이 벌인 국정농단의 가장 큰 피해자는 노동자였습니다. 민주노총은 종북세력으로 몰려 박근혜 불법선거의 희생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선되자마자 노동자를 적대시하며, 경제 파탄과 사회 불안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래서 전교조와 공무원노조를 법 밖으로 몰아내고, 헌법이 보장하는 최소한의 노동기본권마저 빼앗아 버리는가 하면, 공기업의 단체협약을 해지하고 임금 등 근무조건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등으로, 부당노동행위를 일삼았습니다. 드디어는 노동개혁의 이름으로, 쉬운 해고와 임금 삭감에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국회를 겁박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는 현행 법률을 어겨 가며, 성과연봉제를 강요하고 불법으로 시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왜 그렇게 집요하게, 이런 노동자를 쥐어짜는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했는지 알게 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 패거리들이 많은 돈을 빼돌리기 위해,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 등을 만들면서, 전경련을 통하거나 재벌 총수를 불러 불법 거액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반대급부로 재벌에게 유리한 노동개혁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집요하게 난리를 쳤던 것입니다.

매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 항거한 11월13일을 중심으로 열리는, 전태일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였지만 올해는 좀 달랐습니다. 박근혜 정권의 온갖 탄압을 투쟁으로 돌파하며 버텨 온 노고를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가열찬 투쟁 속에서 위원장을 감옥으로 보내야 했던 억울과 분노도 함께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보낸 한상균 위원장의 옥중서신을 부위원장이 대신 읽을 때에는 모두가 두 손을 꽉 쥐기도 했습니다.

그런 싸움이 있었기에 오늘과 같은 민중대회가 가능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박근혜 정권을 몰아내는 큰 싸움에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고 또 앞장서야 한다는 다짐을, 각자가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름다운 청년노동자 전태일은 46년 전 자기 몸을 불사르면서 스스로 불씨가 됐습니다. 그 불씨는 수천수만의 민들레 홀씨처럼, 수많은 노동자의 가슴에 떨어져 수많은 전태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날 서울광장에 모인 수십만 노동자들은 외쳤습니다.

"우리가 백남기다." "우리가 한상균이다." "우리가 모두 전태일이다."

하나의 작은 불씨가 들불이 되고 산불이 돼 광장을 태우고 거리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청와대를 태우고 노동 중심, 사람 존중의 새 시대를 열어젖힐 것입니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