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이 있다. 애써 죽을 쒔는데 엉뚱한 인간이 가로챈다면, 얼마나 허탈하겠나. 현 정세에서 자주 듣고 쓰는 얘기다. 나도 걱정했다. 박근혜가 퇴진하는데 세상은 그대로고 대통령만 바뀌면 어쩌나, 라는 고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그 걱정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박근혜 퇴진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한편으론 주제도 모르고 우리의 힘을 과신한 걱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박근혜를 퇴진시킨다면 그것은 살아생전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현대사의 격변이 된다. 죽 쒀서 개 줘도 억울하지 않은 판이다.

실제로 박근혜가 퇴진하면 첫째,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을 획기적으로 진전시킨다. 둘째, 현대사의 발목을 지긋지긋하게 붙잡고 있는 박정희를 무덤으로 돌려보낸다. 셋째, 수구보수가 약화되고 합리적 보수가 강화된다. 넷째, 사회 밑바닥까지 뿌리 깊게 잠식하고 있는 패배감과 무력감을 털어 낸다. 다섯째, 진보의 저변이 넓어진다. 여섯째, 사회의 변화 흐름을 만드는 자양분이 된다.

박근혜 퇴진에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스스로 물러난다. 이것은 난망한 기대다.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둘째, JTBC를 능가하는 폭로가 나온다. 세월호 7시간은 치명타가 될 것이다. 그래도 박근혜는 버틸 가능성이 크다. 셋째, 재벌이나 미국이나 새누리당 등의 지배세력이 퇴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박근혜 때문에 자기 이익에 심대한 손해가 발생하면 퇴진공작을 펼치고도 남을 집단이다. 재벌총수 구속과 사드 반대를 함께 외쳐야 한다. 넷째,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퇴진에 앞장선다. 그들 특성상 난망한 기대다. 그들은 국민촛불과 거국중립내각 사이의 담장에 서서 이쪽저쪽 눈치 보며 상황을 혼란스럽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눈 부릅뜨지 않으면 죽을 쑤기도 전에 죽 그릇을 엎어 버릴 것이다. 다섯째, 국민촛불이 완강하게 지속되면서 참가인원이 더더욱 확대되고 시·군·구의 골목과 장터로 넓게 퍼진다. 이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방안이다. 이것이 뒷받침돼야 첫째부터 넷째까지의 실마리도 기대해 볼 수 있다.

11월12일 민중총궐기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광화문의 촛불 규모는 회를 거듭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민중총궐기에 100만명 넘게 모였다고 한다. 우리도, 촛불에 참여하지 않은 국민도, 흥분했다.

그리고 우리는 11월14일, 오늘을 맞이했다. 우리의 흥분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실은 난감한 상황이다. 오늘부터가 박근혜 퇴진의 진검승부인데, 앞날은 마냥 낙관적이지 않다. 가장 어려운 점은 총궐기를 능가하는 규모가 만들어지기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국민 눈에는 촛불이 축소되는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틈에 청와대와 야당들은 슬그머니 타협을 시도할 것이다.

그것을 막는 최선의 방안은 광화문 촛불을 지역 촛불로 그대로 이어 가는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 촛불이 확산돼야 한다. 매주 촛불 연인원이 100만명에 육박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동조합이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에서 물꼬를 텄다. 인천공장에서 부평역까지 조직적으로 퇴근행진을 했다. 이를 현대중공업이 이었다. 몇몇 지역에서도 퇴근행진을 시도했다. 바로 이것이다.

민주노총의 모든 산별노조·연맹과 사업장은 각각의 특성에 어울리는 행진을 즉각 기획하고 조합원들을 최대로 조직해야 한다.

공장에서 시내까지 자전거·오토바이 등을 앞세운 퇴근행진을 조직해야 한다. 카트행진, 보건의료행진, 언론행진, 비정규직행진, 사무직행진도 뒤따라야 한다. 즉각 조직돼야 하며 한 번으로 끝내면 안 된다. 매주 이어져야 한다. 노동자들의 선도적 행진 물결이 반려동물행진, 농기계행진, 포장마차행진, 청소년행진 등으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돼야 한다. 그게 터지면, 촛불 참석자가 연인원 1천만명을 넘고 2천만명도 넘을 수 있다.

그 힘을 받아야 민주노총 11월 총파업은 성공한다. 최대한 많은 사업장이 파업 대열에 합류한다. 수십만명의 조합원을 지역촛불로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렇지만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아직도 단위사업장 분위기가 지지부진하다. 최장기간 철도노조 파업과 미리부터 준비된 총궐기가 없었다면, 전체 촛불의 규모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관성적 사업풍토와 사측의 방해공작, 예상되는 탄압, 게을러진 우리의 자세 등 장벽이 너무 많다.

그러나 노동조합 동지들! 현 정세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 퇴로나 우회로는 없다. 청소년까지 나서는 이 정세에서마저 우리가 빌빌댄다는 것은 시쳇말로 쪽팔리는 일 아닌가.

망설이지 말자. 노조 집행부 선거운동 하듯이 나선다면 우리가 못할 일은 없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 보자. 정말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서 죽는소리 하고 있나?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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