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지난 몇 주간 우리는 시시각각 밝혀지는 새로운 사실들을 보도하는 뉴스 앞에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그 속에는 얼토당토않은 전근대적·봉건적 질서를 머리에 이고서, 4년의 귀한 시간을 허비하며, 국기의 훼손과 능멸 속에 ‘헬조선’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던 우리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몸통은 분명 현대사회의 그것을 갖추고 있지만, 그 뇌는 중세 봉건사회로 돌아가 있는 상태다. 둘 간의 불일치 속에서 우리의 몸은 점차 비틀어지고 말라 가며 기형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사이비 공화국이 돼 버린 대한민국을 지옥과 같은 봉건사회로 인식했던 청년들은 너무나 정확히 그 실체를 짚었다.

고전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일찍이 지배현상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며, 그 방식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다양한지 제시했다. 그를 통해 현대사회에서 국가란 무엇이고 현대 국가를 통한 지배방식은 어떤 특성을 갖는 것인지, 그것은 전근대적 지배방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명쾌히 규명했다. 이를 위해 그는 관료제(bureaucracy)에 주목했다. 역사 속에 존재한 관료제를 크게 셋으로 유형화해서 그 내적인 운영원리들의 상이성을 제시했다.

중세시대 ‘가산관료제’는 봉건군주와 신하들 간의 충성과 생존기반 제공이라는 거래관계에 기초한 ‘전통적 지배’의 기초를 이룬다. 여기서는 엄격한 시험의 통과나 객관적인 자격의 증명이 아니라 오로지 주군의 눈에 잘 들고 충성을 서약하고 확인받는 게 중요하다. 신적 권위를 대행한다고 믿는 샤먼(Shaman)과 그에 대한 비합리적 정서적 몰입을 통한 카리스마적 지배는 리더를 영웅시하고 무비판적으로 숭배하는 관료들을 필요로 한다. 이들과 달리 현대(근대) 사회에서는 명문화된 법률에 기반해 임무와 책임이 명확히 구분된 분업구조를 갖춘 비인격화된 구성원으로 이뤄진 ‘현대적 관료제’를 토대로 하는 ‘합법적 지배’가 주를 이룬다.

합리적 이성 가로막은 박근혜 카리스마

베버는 현대적 관료제를 통한 합법적 지배를 탈주술화된(de-mythtified) 현대사회 구성원들이 불가피하게 취할 수밖에 없는 차악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면서 비인격적 관료제가 초래할 수 있는 병폐를 경고했고, 건강한 카리스마적 리더의 출현을 통해 그런 문제들이 해결돼야 함을 조심스럽게 강조했다.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현대의 직업정치가들은 비록 악한 수단을 사용할지라도 반드시 공동체를 위한 선의 목표를 이루는 ‘책임윤리’를 구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핵심자원은 그녀의 실존에서 만들어진 카리스마였다. 그 카리스마는 크게 두 가지 자원에 기초한다. 하나는 20년 가까이 나라를 지배한 아버지를 향한 일부 대중들의 향수에 기반한 후광이다. 다른 하나는 부모의 비극적 비명횡사로 인해 얻어진, 대중들의 무한한 연민(sympathy)이다.

이 둘을 적절히 결합시켜서 그녀에 대해 묻지마 식 절대긍정과 숭배를 보내던 대중들은 박근혜의 정계진출 이후 정치인으로서 그녀가 민주화 도상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병리현상들을 해결할 수 있는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믿음까지 갖게 됐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정치적 위기를 맞이한 보수정치세력은 박근혜가 향유하고 있던 카리스마적 자원을 이용해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해 가고자, 그녀와 결탁했다. 이로써 70년대를 마감하며 몰락했던 박근혜와 유신시대 권력자들은 2000년대에 접어들어 약 사반세기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정치인 박근혜는 대중들과 적절히 거리를 두며, 자신의 본질을 철저히 은폐하는 소통전략을 취했다. 차떼기 비리를 자행한 무능한 비리정당이었던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을 천막농성을 통해 구해 낸 후 승승장구했다. 급기야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세력 전체를 대표하는 후보가 됐고, 스스로 나서 새누리당이라고 당명까지 바꾼 후 마침내 대통령 권력까지 거머쥐게 됐다. 박근혜 정권이라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괴물은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졌다.

지금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는 대로 박근혜는 베버의 눈으로 보면 현대 정치가가 지녀야 할 자질·역량·덕목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이 나라 민주공화국의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그녀는 자기 마음대로 최순실이라는 측근에게 그것을 재위임해 버린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최순실씨는 박근혜의 비호하에 나라 운영에 속속들이 간여하면서 국정의 꼭대기에서 일종의 가산관료제적 질서를 구축했다. 자신의 일가와 가신들의 사적 안위를 위해 나라의 몸통을 함부로 비틀면서 공적 자원들을 함부로 사유화한 정황이 즐비하다. 그러한 지배체제하에서 순식간에 인구 5천만명을 보유한 세계 10대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주요 의사결정자들은 최순실에게 잘 보여야 목을 보존할 수 있는 봉건적 가치질서에 휘말려 갔다.

사회는 마치 중세를 향한 재주술화(re-mythtified)의 길로 나아갔고, 권력의 상층부에서는 합리적인 판단과 토론, 비판과 성찰이 마비돼 버렸다. 대통령이 던지는 은유적 시그널을 마치 교주의 교리처럼 숭배할 것을 강요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 그 시그널의 방향성은 공적 가치의 구현과는 거리가 멀었고, 어이없게도 최순실의 사적인 이권신장에 맞춰져 있었다. 일부는 자연스럽게 대통령 개인을 위해 피드백됐을 수 있다.

광장이 위축될 때 역사는 퇴보한다

이 통탄할 상황을 전 국민이 깨닫게 된 지금, 시급히 필요한 것은 일단 중세시대로 돌아가 있는 우리의 정치질서·지배질서를 다시 현대적인 것으로 회복하는 일이다. 시대착오적인 가산관료제의 군주처럼 행사해 온 자나, 대중들의 카리스마적 숭배를 즐기며 국민을 우습게 본 사이비 국가원수나 모두 그 비행을 낱낱이 밝히고 책임을 묻고 사법처리해야 한다.

이 나라가 절대왕정도 봉건영주국도 아니며, 살아 있는 법과 정의에 의해 움직여지는 민주공화국임을 국민이 명확히 느끼도록 해야 한다. 그에 더해 문제의 원인을 보다 뿌리 깊게 진단하고 발본적인 처방을 내리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박근혜 정권 이전부터 한국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사회의 공기 내지 정신적 기운이 탁해진 느낌이다. 민주화의 도상에서 적어도 외환위기 이전까지를 돌아보면, 우리 사회 지식인들은 이 나라의 형성과 운영, 그리고 미래를 놓고 폭넓고 진지한 논쟁을 매우 활발히 전개했다. 계몽된 시민들이 참여하는 일종의 지적인 담론광장(discourse plaza)이 싹트고 커 나갔다고 할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공적 가치 실현을 향한 열정과, 그것을 논쟁으로 풀어 나가려는 의지가 한껏 악해진 듯하다. 외환위기 이후 사회와 조직이 나를 지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대중들은 생존을 향한 각개전투에 몰입했고, 시장에서 대박을 바라는 자본주의적 대중으로 변모해 갔다. 광장은 한산해지고 잡초들이 무성해져 갔다.

다행히 공적 가치는 적어도 김대중·노무현 같은 지도자가 국가를 운영할 때에는 정부에 많은 것들을 위임해도 기본 이상으로 실현되곤 했다. 그 때문에 국가라는 존재는 늘 그 정도 수준은 지키며 운영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후 우리가 보다시피 한국은 점차 퇴행해 갔고, 지금 이렇게 만신창이가 돼 있다.

일각에서 지금의 사태를 대통령제 문제로 돌리고 개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 성찰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문제를 호도하는 것일 수 있다. 같은 대통령제라도 노무현같이 나라를 이끌 수도 있고 박근혜같이 이끌 수도 있는 것이다.

대통령제의 불완전성으로 손쉽게 문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 정권’이라고 하는 괴물이 어떤 토양 위에서 탄생할 수 있었는지 파고들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답은 계속해서 우리 모두가 찾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사회에서 공적가치를 지향하는 담론광장이 축소돼 간 것, 대중들로 하여금 파편화된 자기이해에 몰입하게 하는 사회경제적 분위기가 형성돼 간 것 등이 오늘의 비극을 만드는 기반으로 작용했다는 판단이다.

이 시점에서 진보와 보수를 따질 계제는 아니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유신체제 몰락과 함께 사라졌던 박근혜를 정치와 역사로 재소환한 것은 바로 한국의 보수다. 뒤늦게 깨닫고 그 실체와의 동거를 거부하고 나서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조만간 다가올 권력교체기를 앞두고 박근혜의 이용가치를 용도폐기했다는 계산의 냄새도 느껴진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앞에서 한국의 보수정객과 보수언론들은 그들을 비난하기 이전에 자기반성부터 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엄연히 그들의 지지와 엄호하에 만들어졌고 유지돼 왔음이 명백하다.

이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건강한 광장정신이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법 앞에 평등한 개체들의 건강한 의지를 모아 내는 것이 그 핵심이다.

광장이 위축됐을 때, 정치는 주술에 빠지고 중세로까지 회귀할 수 있음을 우리는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재주술화되고 사유화돼 버린 국가권력을 국민의 것으로 되돌리는 시작점에서부터 광장의 정신은 살아나야 한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미래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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