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영전구 광주공장에서 발견된 잔류 수은

남영전구 집단 수은중독 사건이 <매일노동뉴스> 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지 1년이 지났다. 그사이 환경부는 '수은 취급 사업장 환경·안전관리 안내서'와 '기술지침서'를 발간해 올해 7월1일 공개했다. 안전보건공단은 수은 누출시 근로자 대처방안 등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해 용역을 발주했다. 올해 안에 가이드라인이 나올 예정이다. 최근 광주지방검찰청은 공사현장 관리 부실로 수은누출 사고를 발생시킨 혐의(화학물질관리법 위반)로 남영전구 광주공장 관계자 2명과 공사현장 책임자 1명을 구속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남영전구 수은중독 사건 이후 폐유해화학물질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책임자 처벌도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안전교육은커녕 안전장비 하나 없이 철거작업을 하다 맹독성 물질인 수은에 중독된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일 남영전구 수은중독 산재피해자이자 지난달 경상북도 칠곡군 구미국가산업단지 3단지 스타케미칼 공장에서 발생한 폭발사고로 숨진 박영복(가명)씨의 동생과 또 다른 수은중독 피해자 김정현(가명)씨를 광주에서 만났다.



"동생아, 형 이번주에 올라가니까 소주 한잔 하자."

영복씨가 폭발사고 사흘 전 동생 상우(가명)씨에게 전화로 남긴 마지막 말이다. 상우씨는 "형님이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신 것 같아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울먹였다.

영복씨는 지난달 19일 오전 스타케미칼 공장 철거작업 중 사일로 내 원료분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폭발로 사망했다. 지름 10미터에 달하는 탱크뚜껑이 공장에서 150미터 떨어진 하천으로 날아가고 인근 지역에 정전이 발생할 만큼 엄청난 위력의 폭발이었다. 굴뚝 환기구를 제거하기 위해 절단작업을 하던 영복씨도 탱크 뚜껑이 날아간 하천에서 발견됐다.

영복씨는 철거작업을 하는 일용노동자였다. 고향인 군산 어촌마을에서 목선을 만드는 목수였던 그는 방조제로 새만금갯벌이 막히고 포구가 없어지면서 철거일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3월22일부터 26일까지 남영전구 광주공장에서 설비를 철거하다 일을 시작한 지 닷새 만에 수은에 중독됐다. 같은해 10월 수은중독 사실을 알게 됐고, 11월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근로복지공단은 재해 발생일인 지난해 3월31일부터 올해 3월31일까지 영복씨에게 휴업급여를 지급했다. 요양기간을 연장하려면 진료계획서를 공단에 제출해야 했다. 그런데 진료계획서 제출을 위해 올해 3월 검사한 영복씨의 요(소변)중 수은 농도는 정상 수치였다. 병원에서는 소변 1리터당 20마이크로그램 미만의 수은이 검출되자 '정상'이라고 판단했다. 공단은 요중 수은 농도가 정상 수치로 나오자 취업요양(취업치료)을 결정했다. 영복씨의 몸 상태가 취업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병원에 간 날에 한해서만 10만5천원씩 정산해 지급한 것이다. 치료비와 일당 명목이다.

홀어머니 모시고 결혼 준비하던 산재노동자
일 구하러 구미 갔다가 목숨 잃어


하지만 영복씨와 함께 살았던 상우씨와 그를 진료했던 담당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영복씨는 공단이 인정한 산재요양기간이 끝난 뒤에도 노동력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우씨는 "형님이 잠을 못 자서 항상 피곤해했다"며 "돌아가시기 몇 달 전 형제들끼리 만나 족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구토를 하고 움직이질 못했다"고 말했다. 불면증과 어지러움, 구토는 수은중독의 가장 흔한 증상이다.

송한수 조선대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불면증이 심해 약을 처방받았고, 허리·어깨 통증과 손발 저림 증상이 심했다"며 "일상적인 생활은 가능했겠지만 철거작업 같이 힘을 쓰는 일을 할 정도로는 회복이 안 된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올해 4월부터 공단에서 지급한 월 21만원(한 달에 두 번 병원치료비)으로는 생계를 꾸리기 힘들었다. 상우씨는 "뒤에 알았는데 형님이 올해 들어 대부업체에서 100만원, 200만원씩 돈을 자주 빌려 썼더라"며 "집 대출금과 생활비 명목으로 급전을 빌린 것 같다"고 말했다.

몸은 여전히 불편했지만 일흔이 넘은 홀어머니를 모시며 올해 가을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영복씨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상우씨는 "형님이 결혼을 앞두고 목돈이 필요해 일당이 괜찮았던 구미로 일을 나가셨던 것 같다"며 "형수님한테도 '결혼준비도 해야 하는데 (수은중독 사고 이후) 일을 너무 못해서 가진 게 없으니까 돈 좀 벌어 가지고 오겠다'고 말하고 갔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영복씨는 스타케미칼 공장에서 20일 정도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철거작업은 10월21일에 끝날 예정이었다. 영복씨는 철거작업을 마무리하고 사흘 뒤(24일) 여자친구 부모님을 찾아뵙고 결혼날짜를 받기로 돼 있었다. 단란한 가정을 꾸리겠다는 그의 꿈은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차라리 다리 하나 잘렸다면…"

수은에 중독된 지 1년이 지난 데다, 철거일을 다시 할 정도면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또 다른 수은중독 피해자 김정현(가명)씨는 "나는 죽을 만큼 힘든데 겉보기나 검사로는 정상처럼 보이니까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고 답답해했다.

김씨는 수은에 중독된 후 일을 못한 지 1년이 넘었다. 생계는 아내가 책임지고 있다. 공황장애까지 생겨 집 안에 오래 있지도 못한다. 하루의 대부분을 집 앞 공원에서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낸다. 그를 가장 괴롭히는 건 지독한 불면증이다. 하루 두 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다. 어쩌다 깜빡 잠이라도 들라치면 차마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끔찍한 악몽을 꾼다. 주로 자녀들의 신체가 절단되거나 터지는 잔인한 장면에 깜짝 놀라 잠을 깨곤 한다. 그 잔상은 오랫동안 그를 괴롭힌다. 불면증이 심해지면서 수은중독 전 90킬로그램의 건장한 체격이었던 그의 몸무게는 현재 10킬로그램 넘게 빠졌다. 두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김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6개월 동안 휴업급여를 받았다. 그 역시 소변 중 수은 농도가 정상수치로 나오면서 5월부터는 병원에 가는 날에만 10만5천원씩 받고 있다. 김씨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 정도인데, 공단에서는 요중 수은 농도만 보고 내가 일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한다"며 "차라리 다리 하나가 잘리거나 눈이 하나 빠지면 장해급여라도 받을 수 있을 텐데 답답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영복씨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김씨는 "남 일 같지가 않다"고 토로했다.

"저도 이 돈(10만5천원)으로 버티다 버티다 못 버티면 일을 나가야겠죠. 그러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요."

"뇌에 쌓인 수은 배출하기 어려워
요중 수은 농도만으로 치료종료 판단 안 돼"


송한수 교수는 이를 두고 "우리나라 산재보상제도의 허점"이라고 지적했다. 산재노동자 개개인의 몸상태나 조건은 보지 않고 정해진 기준에 맞춰 판단하다 보니 되레 피해를 보는 노동자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수은중독이다.

송 교수는 "소변 중 수은 함량만을 보고 치료종료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송 교수에 따르면 인체가 수은에 노출되면, 흡수된 수은은 혈액을 따라 전신으로 퍼진다. 대부분 뇌·신장·간 같은 장기에 쌓인다. 이때 뇌로 전달된 수은이 산소와 만나 산화돼 뇌세포에 축적되면 다른 장기와 달리 밖으로 잘 배출되지 않는다.

송 교수는 "신장에 쌓인 수은은 대소변을 통해 배출되지만 뇌에 쌓인 수은은 잘 배출되지 않는다는 동물실험 근거가 있다"고 설명했다. 남영전구 수은중독 피해자들이 소변 중 수은함량을 가지고 '정상' 판정을 받은 후에도 불면증이나 악몽을 비롯한 다양한 신체 이상을 호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해 공단 관계자는 "수은중독이라는 승인된 상병으로 인해 다른 상병이 올 수 있다는 주치의 소견이 있을 경우 추가상병을 신청할 수 있다"며 "현재 남영전구 수은중독 근로자들 중 정신과 상병으로 승인된 경우가 있다"고 밝혔다.

송 교수는 "수은중독 피해자들의 뇌를 잘라 수은함량을 검사하지 않는 이상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단이 이 같은 수은중독의 특징을 반영해 처음부터 산재요양기간을 합리적으로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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