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스산한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푸른 기와집에서 벌어진 국정농단 막장 드라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안 그래도 먹고살기 팍팍한 서민들은 부아가 치민다. 저들은 알까. 두고두고 말썽을 부리는 김치냉장고 한 대를 바꾸려고 쥐꼬리만 한 생활비에서 다달이 몇 만원씩 쟁여 두는 노부인의 마음을. 아이는 조금 나중에 갖자고, 생활비 절반을 차지하는 전세대출 상환금에 벌벌 떠는 맞벌이 부부의 심정을. 술·담배를 줄이고 말지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자식 학원을 끊겠냐는 외벌이 가장의 한숨을.

<매일노동뉴스>가 지령 6천호를 맞아 국정이 외면한 도시근로자들의 가계부를 펼쳐 봤다. 그 속에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내용은 없다. 오늘의 씀씀이를 줄여 불안한 내일을 기약하는 평범한 이웃, 바로 당신의 이야기다.
 

 
 

여기 세 가족의 지난달 가계부가 있다. 서울 화곡동에 사는 30대 맞벌이 부부 최정호(38·가명)·김희정(31·가명)씨는 둘이 합쳐 지난달 426만8천390원을 벌어 432만원을 썼다. 수입의 절반이 전세대출 상환금으로 나갔다. 아이가 없어 교육비 지출은 없다. 민간보험료로 15만원을 쓰고, 저축은 30만원을 했다.

경남 거제시의 한 대형조선소 정규직으로 일하는 박수호(44·가명)씨는 외벌이 가장이다. 본인과 아내·장모님·자녀 등 네 식구가 한 집에 산다. 지난달 상여금(월할)을 포함해 443만5천890원을 받아 448만4천262원을 썼다. 장모님 병원비와 자녀 교육비, 주택융자 상환금, 민간보험료로 들어간 돈이 많다. 혼자 벌어 저축까지 하기는 버겁다.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청소일을 하는 정순희(69·가명)씨의 가계부에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정씨는 은퇴한 남편,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두 아들과 살고 있다. 자신이 번 돈으로 네 식구 생활비를 충당한다. 이미 성인이 된 두 아들이 부모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현재 거주하는 서울 신림동 아파트가 자가여서 갚아 나갈 빚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도 놀랍긴 마찬가지다. 지난달 155만7천730원을 벌어 138만원을 썼다. 17만7천30원이 남았다.

이들 세 가족은 가구 구성원도 벌이 수준도 제각각이다. 소득 규모만 보면 최정호·김희정씨 부부와 박수호씨네 수입이 통계청이 내놓은 올해 2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득(430만6천원)에 가깝다. 2분기 물가상승 폭을 제외한 실질가구소득 증가율은 0%였다. 분기 단위로는 지난해 3분기 이후 4분기째(0%→마이너스 0.2%→마이너스 0.2%→0%) 제자리걸음을 했다. 소득이 늘지 않으면 가계는 지갑을 닫는다. 이들 세 가족은 지난달 주로 어디에 돈을 썼을까.<표1 참조>

 

최정호·김희정씨 부부는 한 달 벌이 중 167만원을 소비에 썼다. 젊은 세대다 보니 세 가구 중 의류·신발 구입비와 오락·문화비가 상대적으로 높지만 과소비로 볼 수준은 아니다. 박수호씨네는 월급 중 323만원을 소비에 지출했다. 식료품·비주류음료와 보건, 교육비 씀씀이가 상대적으로 컸다. 연로한 장모님과 어린 자녀에게 들어간 돈이다. 정순희씨 집은 소비의 흔적 자체를 찾기 어렵다. 고혈압과 고지혈증을 앓고 있어 의료비 지출이 전체 소비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그는 최근 몇 년간 가장 뿌듯했던 일로 “생활비를 아껴 김치냉장고를 바꾼 일”을 꼽았다.

세 가구 소비성향에서 공통점이 눈에 띈다. 음식·숙박비 지출 내역이 없고, 적게는 15만원에서 많게는 58만원까지 민간보험료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건강 악화나 노후에 대한 깊은 불안이 느껴진다.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여가에 들어가는 돈을 아껴 ‘셀프 복지시스템’을 구축한 셈이다. 가계소득이 내수로 흘러드는 선순환이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다. 복지제도 구멍 탓에 대기업 보험회사만 꽃놀이패를 쥐고 흔든다.

 


줄어드는 소득, 늘어나는 빚

한국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는 경고음이 울린 지는 이미 오래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올해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2분기보다 0.7% 증가하는 데 그쳤다. 분기별 성장률이 1년째 0%대에 머물러 있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리거나 건설경기라도 띄우지 않으면 사실상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그림2 참조>

경기 침체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먼저 수출이 시원찮다. 당장 국가대표 선수 격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제품불량에 따른 수출 감소로 고전하고, 우리나라 최대 교역국인 중국의 성장이 둔화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시장은 보호무역의 장벽을 높이고 있다. 수출로 먹고살아 온 한국경제에 심각한 악재다.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 성장잠재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은 최근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2000년대 초반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2%대까지 떨어졌음을 시사했다. 경제의 기초체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얘기다. 더구나 내년부터는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생산과 소비가 함께 줄면서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전망이다.

아킬레스건은 가계부채다. 1천300조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는 민간의 소비여력을 갉아먹는다. 기하급수적으로 늘러나는 가계부채를 보노라면 무서운 느낌마저 든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6월 말 가계부채 규모는 1천257조원으로 전년보다 123조원 증가했다. 내년 말에는 1천500조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가계소득 부진에 따른 저소득층의 대출 확대가 빚을 늘린 원인 중 하나다. 저소득층인 1·2분위의 생활비 마련과 부채상환을 위한 신용대출 비중이 크게 상승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김삼화 국민의당 의원이 최근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에 의뢰해 우리나라 매출 100대 기업의 ‘노동 분야 사회지표’를 분석한 결과다. 요약하면 기업의 몫은 늘고 노동자 몫은 줄었다.

박근혜 정부 출범 3년간(2012~2015년) 100대 기업 고용증가율은 국내 평균(상용직 기준 13.4%)의 절반 수준인 7.3%에 그쳤다. 노동자 몫을 의미하는 노동소득분배율은 국내 평균(2015년 기준 62.9%)보다 12%포인트나 낮은 50.9%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100대 기업 인건비 대비 배당성향은 13.1%에서 21.3%로 높아졌다. 직원에게 인건비 100원을 지급할 때 주주에게 지급한 배당액이 3년 사이 13원에서 21원으로 증가한 셈이다. 기업들이 투자를 통한 일자리 확대보다는 배당을 통한 이익 실현에 치중한 결과다.

황선자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기업의 낮은 노동소득분배율과 고배당, 저조한 고용실적은 경제성장의 과실이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고 일자리 창출로도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며 “노동자들의 가계소득을 감소시켜 내수부문을 침체시키고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그림3·4 참조>

약발 떨어진 수출·부채·이윤 주도 성장

갈수록 노동자 몫이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경제는 그동안 대기업 위주 수출 주도 성장, 소득부족분을 부채에 의존하는 부채 주도 성장, 법인세 인하와 규제 완화로 기업의 수익을 높이는 이윤 주도 성장에 기대어 왔다. 정부는 기업이 성장하면 일자리와 소득이 늘어난다는 ‘낙수효과’를 강조했다. 그러나 현재의 저성장과 소득감소 추이는 기존 성장전략의 약발이 떨어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자본과 노동 사이, 노동과 노동 사이의 ‘공정한 분배’를 실현함으로써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국제노동기구(ILO)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신자유주의적 이윤 주도 성장 모델의 대안으로 소득 주도 성장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노동소득과 자영업소득을 높여 노동소득분배율을 개선하자는 것이다. 소득이 오르면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ILO는 2012년 내놓은 ‘총수요는 임금 주도 성장과 이윤 주도 성장 중 무엇을 요구하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기업이윤이 1%포인트 늘어날 경우 미국(0.388)과 터키(0.208)·이탈리아(0.1)·독일(0.029)·영국(0.025)·프랑스(0.021), 일본(0.014) 등은 모두 총수요가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같은 보고서에서 우리나라는 자본의 몫이 1%포인트 늘면 총수요가 0.063%포인트 줄어드는 것으로 분석됐다. 자본의 몫을 늘리는 기존 성장모델은 나라 전체의 총수요를 감소시켜 결국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연구 결과가 있다. 홍장표 부경대 교수(경제학)가 2014년 발표한 ‘한국의 기능적 소득분배와 경제성장 : 수요체제와 생산성체제 분석을 중심으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1% 오를 때 국내총생산(GDP)이 0.68~1.09%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실질임금이 1% 늘어나면 실질노동생산성은 0.45~0.5%, 고용은 0.22~0.58% 증가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홍 교수는 “자본소득보다 노동소득의 소비성향이 월등히 높기 때문에 실질임금이 상승하면 소비지출이 크게 증가한다”고 설명했다.

노동자 협상력 저하, 노동소득분배율 악화

자본의 몫이 늘고 노동의 몫이 줄어드는 현상과 관련해 노동문제 전문가들은 노동자 집단의 협상력 저하에 주목한다. 세계화가 ‘발 없는 자본’과 ‘발 있는 노동’ 간 힘의 불균형을 심화시켰다면, 저성장체제는 일자리 부족과 유연화를 통해 노동의 협상력을 한층 더 떨어뜨린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아지거나, 정부 정책이 노조활동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설계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은 2004년 10.6%를 기록한 이래 2010년(9.8%) 한 해를 제외하면 모두 10%대 초반대를 기록하며 정체 중이다. 노조라는 우산에 몸을 피할 수 있는 노동자가 10명 중 1명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노조가 비정규직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비정규직 노조 가입의향과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비정규직 노조 조직률은 2007년 5.1%에서 지난해 2.8%로 반토막이 났다. 노조의 보호를 받기 어려운 노동자들이 저성장의 유탄에 더 쉽게 노출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노조가 있는 대기업 정규직’이 ‘노조가 없는 중소기업 비정규직’보다 월급이 3배나 많고 6배나 오래 근속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등 4대 보험과 퇴직금·상여금 적용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났다.<표2 참조>

정부는 그러나 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이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정부 정책은 정확하게 반대방향을 가리킨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과 이른바 2대 지침은 해고를 쉽게 하고 임금을 낮춰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줄이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정부의 복지정책도 노동자 협상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회보장제도가 강화되면 노동자들의 유보임금이 늘어나 협상력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황덕순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부가 사회복지 지출을 늘려 현금급여나 공공서비스를 확대하는 만큼 노동자들은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을 아낄 수 있는데 이를 간접소득이라고 한다”며 “간접소득이 늘면 노동자의 구매력이 높아져 소비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상황은 비관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 올해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중 추산치는 10.4%로, 35개 회원국 가운데 34위를 차지했다. 한국보다 사회복지지출 비중이 낮은 국가는 멕시코(7.5%) 단 한 곳뿐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임금체계, 노동자 손으로 만들자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혼이 비정상인 나라, 국민을 개돼지로 여기는 사회에도 희망이 남아 있을까.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드러난 정부와 기업집단의 부패사슬구조는 이 나라가 수렁으로 빠져든 인과관계를 규명한다. 사태의 핵심은 무당이 아니라 정경유착이다. 기업들이 대통령 말 한마디에 거액을 갖다 바친 이유가 무엇일지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불법행위에 대한 묵인이나 경제적 특혜를 조건으로 하는 추악한 거래의 실체가 드러날 날이 머지않았다.

돈과 권력을 움켜쥔 자들이 알고 보니 범죄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경악할 만한 사실은 이들이 결코 새로운 성장동력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한다. 나라를 망친 주범들에게 더 이상 미래를 맡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소득 주도 성장이 분배의 수단으로 노동소득분배율 제고와 임금소득의 형평성을 추구한다면 노동조합의 역할은 결정적이다”는 박태주 고려대 노동대학원 연구교수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지난해 기준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 대비 산별노조 전환율은 80%에 달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산별노조였나”라는 질문에 시원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조직은 거의 없다. 아직도 기업별 교섭체계가 강하게 작동하고,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조차 거부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기업별 교섭체계는 이중노동시장과 친화력을 갖는다. 노조의 사회적 발언권을 약화시키고, 경제적 조합주의에 빠져들게 하며, 연대의 끈을 놓아 버리게 만든다.

박 교수는 “노조가 기업의 틀에 갇혀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은 저성장 시대에 한계에 도달했다고 봐야 한다”며 “산별 전환을 추진했던 목적이 임금의 극대화가 아니라 임금의 표준화, 업종이나 지역 수준의 평등한 임금구조를 만들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계가 소득격차를 줄이고 비정규직의 확산을 막아 내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임금체계를 만드는 작업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산별교섭과 사회적 대화, 노동자 경영참여는 ‘한국형 연대임금’을 실현하는 수단이 된다. 비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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