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보니 최근 국왕이 숨진 태국이 떠오른다. 태국은 일본·영국처럼 국왕은 실질적 권한이 없고 명목상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나라다.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살아있는 부처였다”고 평가받았다. 그는 재위 70년 동안 21번의 국무총리 교체와 18번의 군부쿠데타가 발생했음에도 건재했다. 국왕은 정국혼란을 수습한 중재자였다.

이것은 거짓된 신화였다. 푸미폰 국왕은 선거와 쿠데타가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철저히 왕실을 인정하는 세력에게 손을 들어줬다. 왕실을 위협하는 내각 총리는 실각됐다.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은 언제나 국왕에게 승인을 받았다. 푸미폰 국왕의 이런 권능은 봉건적 잔재 덕에 가능했다.

태국 형법 제112조에는 ‘왕실모독죄’라는 법 규정이 있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유신체제를 선포한 박정희 정권시절 국가원수모독죄와 유사하다. 왕과 왕비 그리고 황태자에 대한 모독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30년 형에 처하는 법이다. 푸미폰 국왕은 왕권 약화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가차 없이 왕실모독죄를 적용했다. 태국의 대표적인 노동운동가인 소묫 프늑사까셈숙씨도 여기에 해당한다. 소묫은 지난 2011년 왕실모독죄로 구속돼 2013년에 법원으로부터 11년형을 선고받았다. 왕실모독죄 혐의를 받고 수감된 민주·인권·노동운동가만 1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시대를 역류하는 태국의 봉건적 잔재는 또 있다. 태국은 국왕을 대신해 왕실을 관장하는 ‘섭정’이라는 제도가 있다. 섭정은 왕권 계승에 결정적 역할을 하며 나라 운영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푸미폰 국왕이 죽으면서 섭정으로 임명한 프렘 틴술라논다 추밀원장은 대표적인 경우다. 올해 96세인 프램 추밀원장은 공군대장 출신으로 쿠데타를 주도했고 80년부터 8년간 총리를 지냈다. 프램 추밀원장은 푸미폰 국왕의 오랜 가신이었다. 군부출신 가신들은 쿠데타로 국왕에 충성을 했고, 국왕은 그들을 섭정으로 임명해 왕실을 보호한 것이다. 이러니 푸미폰 국왕은 ‘살아있는 부처’로서 떠받들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가신과 측근들은 권력을 이용해 부정축재를 벌였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태국의 이러한 정국상황과 절묘하게 겹쳐진다.

박근혜 대통령의 40년 지기인 최순실씨도 푸미폰 국왕의 가신인 프램 추밀원장에 못지않다. 일각에서는 “박 대통령 위에 최순실이었다”고 평가한다. 왕을 대신해 섭정하는 프램 추밀원장보다 최순실씨가 더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는 얘기다.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가 최순실 국정농단을 두고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 부녀의 사교에 씌였다”고 주장할 정도다. 최태민 목사는 70년대 영생교를 만들어 살아있는 부처(미륵)를 자처했다. 최태민의 계승자는 그의 딸 최순실씨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씨는 어려울 때마다 도와준 인연”이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취임 후에도 일부 자료에 대해 의견을 들은 적이 있으나 청와대 보좌체계가 완비된 이후 그만뒀다”며 최씨에게 연설문이 건너갔음을 인정했다.

사과 녹화방송을 한 박 대통령의 말처럼 최순실씨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장관들과의 대면보고를 꺼려했지만 국정에 관한 최순실의 쪽집게 과외는 마다하지 않았다. 최순실씨가 사용한 컴퓨터에선 외교·국방에 관한 기밀사안뿐만 아니라 인사에까지 관여한 정황도 드러났다. 최씨의 권세가 이 정도니 재벌기업들로부터 강제모금을 했다거나 딸 정유라를 부정입학시켰다는 의혹도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이토록 국정농단을 하고서도 최순실씨는 해외도피 와중에 인터뷰를 자청해 “기억이 안 난다”고 부인했다. 최씨는 국정농단 행각이 담긴 컴퓨터조차 자신이 버리고 간 것이 아니라고 발뺌을 했다.

군주제 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국정농단 사건이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났다. 최순실 국정농단이 강타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민주공화국인가. 대한민국은 가신과 측근들이 활개 치는 군주국가와 다름 없다. 그것도 신권과 왕권이 교묘히 결합한 군주정. 민주정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측근과 가신은 더 이상 성역이 아니다. 최순실 국정농단을 고백한 박 대통령도 수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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