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호 한국노총 조직본부 교육국장

그의 사과문은 실로 대단했다.

1분47초의 짧은 시간, 단 476자로 이뤄진 문장으로 국민을 만감이 교차하게 만들었으니 어떤 훌륭한 연출가라도 이렇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놀라움

언론의 최순실씨 국정농단이 보도된 지 20시간 만에 그는 대국민 사과를 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34일 만에야 비로소 이뤄진 첫 사과와 비교했을 때 전광석화와 같은 빠르기였다. 무엇이 그를 이처럼 빠르게 카메라 앞에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식의 잘못을 서둘러 진화하려는 부모 혹은 그 반대 경우와 같았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과 분량이었다. 오후 4시2분에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에 접속한 사람들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나 보다’ 하고 착각할 만큼 짧은 시간의 사과였으며, 사과문 전문을 이 칼럼에 옮겨 적어도 4분의 1밖에 채우지 못하는 양에 불과했다.

경이로움

유체이탈 화법의 대가이신 그의 사과는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최순실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이 있다”며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도 표현 등에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고 취임 후에도 의견을 물은 적도 있으나 청와대의 보좌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습니다”라고 말했다.

전경련을 골목대장 삼아 대기업에서 걷은 수백억원의 ‘삥’과 비선실세 딸의 학사관리, 민간인의 국정운영 개입 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얼마나 대단한 ‘인연’이길래 대통령 업무를 맡길 수 있었을까. 사과문을 자세히 뜯어 보면 그는 이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저 “좀 더 꼼꼼하게 챙겨 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다. 그는 이 일로 “국민이 놀라고 마음 아파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 국민은 부끄러워하며 분노하고 있다.

허무함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녹화방송이었다고 한다. 15분의 시차를 두고 방송을 내보냈다. 국민이 사과방송을 보고, 듣고 있을 때 이미 그는 관저에 가서 편하게 쉬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도 수고한 자신을 다독이며. 아무래도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머나먼 별나라 안드로메다인 듯하다. 수백광년 떨어진 우주와 지구 사이에는 상상을 초월한 시차가 존재하듯이 유감스럽게도 그와 국민은 그 이상 동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도대체, 왜 우리 국민은 대통령의 목소리를 라이브로 들을 수 없는 것일까. 질문을 받지 않는 기자회견에 익숙해지기도 힘들었는데, 녹화 사과에 적응하려면 또 얼마나 큰 피로에 시달릴지 모를 일이다. 이 정권에서 부끄러움과 피로는 오로지 국민의 몫이다.

노여움

그의 사과는 성난 민심의 불길에 기름을 쏟아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대국민 사과 다음날 대통령 지지율은 17.5%까지 떨어졌다. 20대와 30대는 한 자릿수를 기록했다. 특히 20대 100명 중 3명만이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고 하니, 젊은이들에게 이 나라 대통령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대학가 시국선언도 들불처럼 번져 가고 있다.

이쯤 되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제발 스스로, 국민을 위한 옳은 결정을 내리길 바란다.



한국노총 조직본부 교육국장 (labo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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