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2004년 11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이이화)이 출범했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도 유족 자격으로 기금을 냈다. 할아버지 박성빈씨(1871~1926년)는 동학의 경북 성주지역 ‘접주’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1952년 2월 대구 삼덕동 셋집에서 35살에 재혼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27살 육영수 여사 사이 첫딸로 태어났다. 문재인 전 대표와 동갑이다.

군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58년 장충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 61년 5월16일 아버지는 쿠데타에 성공했다. 아버지는 63년 대통령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65년 성심여중 2학년 때 청와대로 들어갔다. 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홍일점으로 입학했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소녀는 대통령 아버지의 중화학공업 육성에 일꾼이 되려고 공대에 들어갔다.

아버지 박정희와 서강대의 인연도 깊다. 독일 유학을 다녀와 73년부터 서강대 경제학과에서 가르친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서강학파다. 이후 서강학파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 내내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했다.

박 대통령은 2012년 초 SBS <힐링캠프>에 출연해 “대학 때 선망의 대상인 선배가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게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74년 졸업과 동시에 프랑스 유학을 떠났지만 어머니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반년 만에 돌아와 22살에 퍼스트레이디로 살아야 했다.

최근 언론에 박 대통령이 최순실과 함께 등장하는 동영상은 79년 ‘새마음운동’ 관련 행사장에서 찍혔다. 박정희 정부는 유신 말기 터져 나오는 노동자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공장마다 새마을 담당을 두고 통제했다. 박 대통령은 70년대 후반 큰딸을 앞세워 농촌 새마을운동을 공장으로 넓히는 새마음운동을 폈다. 최태민이 만든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초헌법적 기구가 새마음운동을 관장했다. 총재는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구로공단의 한 여성노동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공장 새마을운동으로 새벽 6시30분까지 출근해 공장은 물론 문래동과 양남동 도로까지 청소해야 했다.” 물론 ‘유노동 무임금’이었다. 새마을과장이 얼마나 큰 권력이었는지 “생산2과장은 남보다 월급을 더 준다고 꼬셔서 자기 부서 아가씨를 농락해 여공들의 분노를 샀는데 얼마 뒤 새마을차장으로 승진했다.”

노동자 도시 울산에도 새마음운동의 불길이 번졌다. 박근혜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는 79년 6월19일 오후 울산 현대중공업 체육관에서 새마음 직장봉사단 결의대회를 열었다. 그해 자신의 새마음운동 연설을 모아 첫 저서 <새마음의 길>을 썼다. 훼절한 지식인들은 이 책을 극찬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 송지영씨는 경향신문 79년 3월10일자에 큼직한 서평을 썼다. “큰 영애가 최근 펴낸 <새마음의 길>은 모두 21편의 구슬 같은 글로 편마다 넘치는 애국의 정열과 끓어오르는 인간애의 의지”라고 했다. 송씨는 “편마다 격조 높은 문장”이라고 격찬했다.

송씨는 민족일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로 감형돼 10년을 복역했다. 송씨는 이 서평을 쓴 뒤 승승장구하다 전두환의 신군부에 협조해 언론 탄압에 가담하고 81년 민정당 11대 의원을 지낸 뒤 84년 KBS 이사장이 됐다.

79년 10월 아버지마저 총탄에 쓰러졌다. 대한민국에서 전시가 아닌 평시에 부모 모두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9일간 아버지 국장을 마친 박 대통령은 79년 11월27일 근령·지만 두 동생을 데리고 신당동 옛집으로 돌아왔다. 27살에 부모를 잃은 집안의 가장이 됐다.

박 대통령은 2007년 자서전에서 79년부터 정치에 입문한 97년까지 18년을 ‘외롭고 긴 항해’라고 했다. 82년 풍산 재벌가에 시집간 동생 근령은 6개월 만에 파경을 맞았다. 남동생 지만은 86년 대위로 예편한 뒤 히로뽕을 투약해 2003년까지 모두 6번 마약 혐의로 입건 구속됐다. 결코 혼이 정상이 아니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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